분단의 장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세기 동안 북한을 지켜봐온 주성하 기자의 시선으로 풀어봅니다.
17일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서 한 무리의 북한 청년들이 출구를 빠져나오는 장면이 목격됐다. 출처 유로마이단 익스프레스
이달 17일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서 한 무리의 북한 청년들이 목격됐습니다.
우크라이나 인터넷 매체 ‘유로마이단 익스프레스’가 공개한 짧은 영상에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을 빠져나온 북한 청년들이 기다리던 대형 버스에 올라타는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지난해 7월 28일 노드윈드 항공의 첫 모스크바~평양 직항 여객기가 순안공항에 도착하자 평양 시민들이 환영하고 있다. 노드윈드항공 제공
●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의 용도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은 모스크바 최대 규모 공항입니다. 지난해 7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을 출발한 노드윈드 항공사의 첫 직항 여객기가 8시간 비행 끝에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여객기 기종은 보잉 777-200 ER로 최다 440명이 탑승합니다.
북한은 사람들을 공항에 보내 열렬한 환영 행사까지 열었습니다. 하지만 운항 초기의 기대와 달리 직항 여객기는 극도로 낮은 탑승률 때문에 예정된 운항 횟수를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북한 관광 활성화를 위해 이 항공사에 1회 비행에 약 1억5000만 원이라는 보조금까지 지급했습니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월 2회씩 운항해야 할 직항 여객기는 지난 9개월 동안 월평균 1회만 운영됐습니다. 그마저도 비행기 좌석이 대부분 빈 상태로 운항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북한으로 관광을 가겠다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여객기가 평양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올 때는 상황이 다른 것 같습니다. 17일처럼 북한 노동력을 싣고 오면 10회에 최다 4400명을 모스크바까지 이송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북한이 러시아 항공사에 제값을 지급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날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도착한 북한 청년들이 평양에서 출발했다고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북한에서 선박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 뒤, 여기서 러시아 국내선을 타고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도착하면 비용을 훨씬 절감할 수 있습니다.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도착한 북한 청년들은 똑같은 카키색 동복을 입고, 배낭과 가방까지 단체로 들고 나타났습니다.
“3조 조장 오라우. 야야야”라는 북한 억양 말소리도 들렸습니다.
짧은 머리와 군기가 바짝 든 행동, 상대적으로 건장한 체구 등을 통해 볼 때 북한군 출신들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이들이 현역인지, 막 제대한 군인들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이들은 누구이며, 왜 러시아로 왔을까요.
블라디미르 살도 헤르손 러시아 점령지 주지사와 신홍철 주러시아 북한 대사가 이달 14일 모스크바 북한 대사관에서 회담하는 모습. 출처=살도 주지사 텔레그램
● 군인들 제대시켜 러시아 파견
저는 올해 1월 27일 ‘러시아로 끌려가는 북한 제대군인들’이라는 칼럼을 동아일보에 실었습니다. 당시 북한 소식통은 “올해 제대 대상인 군인 전체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지에 파견된다”고 제보했습니다.
그 칼럼을 통해 저는 북한이 올해 제대군인 중 남성만 골라 보낸다고 해도 4만 명은 될 것이지만, 그 인원이 다 선발될 가능성은 낮다고 썼습니다. 간부나 잘 사는 집 자식들은 돈을 뿌려가며 이래저래 빠질 테니, 선발되는 사람은 일반 백성의 자녀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정은이 러시아 파병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열고, 이들을 위한 기념관까지 평양에 성대하게 준공하는 바람에 주민들은 러시아로 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게 됐습니다.
실제로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최근 북한에선 올해 제대한 청년뿐만 아니라 제대를 2~3년 앞둔 군인들까지 조기 제대시켜 러시아로 파견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러시아와 근로자 몇 명을 파견하기로 계약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원수를 채우기 힘드니 조기 제대란 카드까지 꺼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의 파견 붐이라면 올해 러시아로 가는 청년은 몇만 명은 될 것입니다. 이미 해외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러시아에 많은 북한 여성이 파견돼 일하고 있는 모습이 공개됐습니다. 지금까지는 남성 파견은 많지 않았는데, 올해 부쩍 늘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러시아에 간 북한 근로자들 처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앞서 파견된 북한 근로자들은 하루 16시간 이상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공개됐습니다.
그럼에도 러시아로 간 청년들은 행운아일지도 모릅니다. 요즘 북한 내부에서는 식량 가격이 석 달 만에 두 배 이상으로 상승하는 등 민생이 급격히 악화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 가만히 앉아 굶어 죽기를 기다릴 바에야 러시아에 가서 일하면 적어도 굶어 죽지는 않겠으니 말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현황 지도. 핑크색이 러시아가 장악한 지역이다. 출처: 미국 전쟁연구소(ISW)
● 헤르손의 미래가 북한 손에?
젊고 건장한 북한 청년들은 러시아 어디로 갈까요. 북한 여성 근로자들처럼 물류센터에서 상품 분류하는 일이나 하진 않을 겁니다.
북한 청년들의 예상 파견지와 관련해 요즘 주목되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점령 중인 우크라이나 헤르손 지역이 최근 언론에 자주 오르내립니다.
대표적으로 14일 블라디미르 살도 헤르손주 러시아 점령지역 지사가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관에 찾아와 신홍철 북한 대사와 회동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살도 주지사는 “북한 측은 식량이 필요하며 우리는 식물성 기름, 밀가루, 가공식품 등에서의 협력을 기대한다. 이 분야들에서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살도 주지사는 앞으로 북한과의 농산물 공급 관련 접촉을 확대하고 시범 사업을 통해 상호 이해를 구축하며 문화, 스포츠, 교육 분야에서도 인도주의적 교류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헤르손 지역 농장 등을 둘러볼 수 있도록 신 북한 대사를 초청했습니다.
크림반도와 연결된 헤르손주는 우크라이나 영토로, 전체 면적은 2만8461㎢에 이릅니다. 이는 전라남북도 전체 면적(2만935㎢)에 전북 면적(8,075㎢)을 추가한 정도의 크기입니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까지는 ‘우크라이나의 바구니’라고 불릴 정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였습니다.
하지만 현재 러시아가 주 면적의 72%를 점령했고, 현지에 살던 우크라이나인들을 대거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전쟁 전 100만 명이던 헤르손주 인구는 절반도 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장악하고 있는 주도(州都) 헤르손시도 전쟁 전 인구 28만 명에서 현재 6~7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헤르손주는 농경지 70%에 물을 공급하던 카호우카 댐이 붕괴해 관개용수가 부족하고, 농경지 30% 이상이 지뢰와 폭발물이 묻혀 있어 접근하기 힘든 땅이 됐습니다. 매년 밀 수백만t을 생산하던 이 지역은 현재 정상적인 영농이 어려운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황폐하고 위험한 지역에 가서 일하겠다는 러시아인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러시아가 헤르손주를 살리려면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사람들, 즉 부서진 건물도 짓고 지뢰도 제거하며 농사도 잘 지을 수 있는 노동력이 필수적입니다.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 나타난 북한 청년들이 바로 러시아가 찾아낸 해결책 아닐까요.
헤르손에 북한 노동력을 보내면 이탈을 방지하기도 매우 쉽습니다. 사방이 러시아 영토 및 점령지와 바다로 둘러싸여서 북한 청년들이 자유세계로 가려면, 치열하게 교전 중인 전선을 통과해 우크라이나로 오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헤르손 지역 전투는 더욱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당국이 20일 밝힌 바에 따르면 지난주 러시아가 헤르손에서 띄운 공격 드론은 약 5500대로 그 전주보다 900대 많아졌다고 합니다.
한 치 한 치 우크라이나 영토로 파고드는 러시아군, 그 뒤를 따르며 지뢰를 제거하고 건물을 세우며 농사를 짓는 북한 청년들. 올해 헤르손에서 보게 될 장면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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