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대전 화재 생존자들, 트라우마에도 “나약하다 찍힐라” 상담 꺼려

  • 동아일보

안전공업 ‘트라우마 상담’ 18% 그쳐
“아직도 사고 건물 못쳐다봐” 호소… “상담 새나가면 인사에 불리” 불신
태안화력-아리셀 때도 참가율 저조… 獨-佛선 PTSD 진단-치료 제도화
전문가 “상담은 권리, 인식 전환을”

“아직도 사고가 난 건물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달 20일 14명이 숨지고 60명이 다친 대전 안전공업 화재 참사에서 살아남은 한 직원은 매일 아침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을 1일 이렇게 토로했다. 그는 “숨지거나 심하게 다친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감이 너무 크다. 다시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걱정된다”고도 했다. 사고 현장을 회피하거나 극심한 불안을 느끼는 것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의 전형적인 위험 징후다. 하지만 이 직원은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지원하는 무료 심리 상담을 받지 않고 있다. 그는 “사고 이후 처리할 일이 많아서…”라며 얼버무렸다.

● 참사 후 상담 18% 그쳐… ‘고위험군’ 방치


산업재해 생존자들은 이처럼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입은 경우가 많지만 정부가 제공하는 치유 프로그램은 현장에서 겉돌고 있다. 1일 산업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화재 이후 지난달 31일까지 트라우마 안정화 교육에 참여한 안전공업 직원은 99명이었다. 안정화 교육은 산재 이후 생길 수 있는 심리적·신체적 변화에 따른 대처 방안 등을 노동자에게 알려주는 과정이다. 고용노동부의 직업 트라우마 관리 매뉴얼은 재해 발생 이후 7일 내 안정화 교육 실시를 권고하고 있지만, 참여자가 안전공업 전 직원 364명 가운데 27.1%에 그친 것이다. 교육 이후 개인 상담으로 연계된 직원은 65명(17.9%)으로 더 적었다.

특히 안정화 교육에 참여한 직원 중 PTSD로 번질 가능성이 큰 고위험군은 10명 안팎으로 파악됐다. 이는 일반인의 PTSD 유병률(1.5%)을 7배 가까이 웃도는 수치다. 문제는 교육조차 받지 않은 나머지 260여 명의 상태다. 전문가들은 이들 속에 얼마나 많은 고위험군이 숨어 있을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고 경고한다. 스스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한 이들은 사각지대에 방치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참여율이 저조한 근본적인 원인은 고용부와 공단의 직업 트라우마 관리 프로그램이 ‘자발적 신청’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국은 2017년 삼성중공업 크레인 붕괴 사고를 계기로 2018년부터 산재 사업장에 무료 트라우마 교육과 상담을 실시하고 있다. 사고 후 7일 이내에 대응해 PTSD 만성화를 막는 게 핵심이다. 하지만 현장 근로자들은 사회적 시선을 의식해 교육장 문턱을 넘지 못한다. 안전공업 직원을 상담한 한 전문가는 “상담 내역이 밖으로 새어 나가거나,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인사고과에 불리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불신이 매우 강하다”고 전했다.

● “상담은 권리이자 의무” 법에 둔 佛-獨

상담 참가율이 낮은 건 이번 사건만이 아니다. 2018년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폭발 사고 땐 직원 159명 가운데 8명만 초기 상담을 받았다. 2024년 6월 경기 화성시 아리셀 공장 화재 때도 상담을 받은 직원은 최종적으로 64명이었다. 파악되지 않은 하청 근로자 등까지 포함하면 상담을 받지 못한 이들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상담받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회적 낙인과 불신이 상담의 장벽이 되지 않도록 해 초기 대응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해외에서는 산재 생존자 등이 심리 지원을 당연한 권리로 여길 수 있도록 아예 법령에 의무 조항을 두고 있다. 독일은 산재가 발생하면 피해자가 반드시 산재의사(Durchgangsarzt)의 진료를 받고, 여기서 PTSD 징후가 보이면 심리 치료로 연계한다. 프랑스는 직원의 PTSD 예방을 사업주의 의무로 보고 이를 막지 못하면 피해를 배상하게 한다.

전문가들은 사망 사고가 난 사업장에선 심리 상담이나 교육에 당연히 참여하게 하고 근로자가 특별히 의사를 밝힌 경우에만 제외하는 옵트아웃(opt-out)제를 도입하자고 제언했다. 이상민 한국상담심리학회장은 “상담받는 게 창피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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