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치료해준 유일한 곳”…외국인 노동자들의 병원 ‘라파엘 클리닉’ [따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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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년 12월 7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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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클리닉 제공.
라파엘 클리닉 제공.
“139번 환자 계신가요?”
“고 투 데어 앤드 체크 유어 블러드 프레셔” (저기 가서 혈압 재고 오세요)
“단장님~ 아랍 분이 오셨는데 통역하실 수 있는 분 있으신가요?”


지난달 12일 일요일 서울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라파엘 클리닉’은 진료를 받기 위해 발걸음 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득했다. 대기표를 받고 순서를 기다리는 환자들과 그들을 돕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봉사자들이 눈길을 끈다. 그런 와중에 여러 번 다녀간 환자들은 봉사자들과 스스럼없이 안부를 물으며 인사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라파엘 클리닉은 26년이란 시간 동안 이주노동자들을 돌봐왔다. 라파엘 클리닉은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은 한 이주노동자의 편지를 받은 데서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이주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깨닫게 된 김 추기경이 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강조하고 나섰고, 서울대 의대 가톨릭교수회와 학생회가 힘을 합쳐 혜화동 성당에서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이후 가톨릭대학교, 동성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교구의 무상 임대로 2014년 지하 1층 지상 5층 규모의 건물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대 의대 가톨릭 교수회와 고려대 연세대 의대 가톨릭 학생회 등으로 구성된 ‘라파엘 클리닉’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강당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로 무료 진료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서울대 의대 가톨릭 교수회와 고려대 연세대 의대 가톨릭 학생회 등으로 구성된 ‘라파엘 클리닉’ 회원들이 서울 종로구 혜화동 동성고등학교 강당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로 무료 진료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한성대입구역 부근에 있는 라파엘 클리닉. 조유경 동아닷컴 기자 polaris27@donga.com
한성대입구역 부근에 있는 라파엘 클리닉. 조유경 동아닷컴 기자 polaris27@donga.com

10명 내외의 전문의, 80여 명의 의과·간호학과 봉사 동아리, 자원봉사자들이 중심이 돼 클리닉을 이끌어가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 대다수가 유일하게 쉬는 날은 일요일뿐이라 자원봉사자들은 황금같은 주말인 일요일을 기꺼이 반납하면서 환자들을 물심양면으로 돌보고 있다. 가정의학과, 내과, 재활의학과, 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치과, 영상의학과 등 웬만한 일반 병원과 다름없는 의료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곳 외에도 동두천, 천안, 그리고 이동클리닉 서비스 등을 통해 전국에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또한 수십여 개의 병원과 연계돼 있어 환자의 상태가 심각하면 타 병원으로 전원시켜 좀 더 세밀한 검사를 받게 한다. 수술이 필요할 경우에는 환자의 상황에 따라 약 200만 원의 수술비를 지원해 준다.

라파엘 클리닉에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 조유경 동아닷컴 기자 polaris27@donga.com
라파엘 클리닉에서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 조유경 동아닷컴 기자 polaris27@donga.com

이러니 이 진료소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타국에 있는 가족을 돌보기 위해 한국으로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몸이 아파도 의료비 때문에 병원에 가기가 망설여진다. 특히 건강보험이 없는 노동자들은 값비싼 의료비를 내야하기 때문에 병원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러기에 ‘라파엘 클리닉’은 이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곳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환자는 “회사 동료의 추천을 받고 왔다. 일하다가 팔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CT나 MRI 촬영을 하려니 너무 비싸, 검사를 받지 못했다”며 “그런데 이곳에서 감사하게도 무료로 검사를 진행해 줘 치료도 잘 받고 있다. 병원비가 부담스러운 내게 너무 감사한 곳”이라고 말했다.

2014년 환자로 라파엘 클리닉을 찾았다가 이제는 봉사자가 된 필리핀인 레놀 씨는 “라파엘 클리닉은 내게 ‘집’ 같은 곳이다”며 “이곳이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

레놀 씨는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얼굴을 다쳤다. 병원에 갔는데 엑스레이 등 기본적인 검사도 안 해주고 얼굴 상처만 치료해 줬다”며 “그런데 상태가 점점 안 좋아졌다”고 말했다.

라파엘 클리닉 제공.
라파엘 클리닉 제공.

얼굴이 너무 아파 일도 가지 못했고 심지어 구토까지 했다고. 그러다가 우연히 알게 된 라파엘 클리닉을 가게 됐다. 레놀 씨의 얼굴을 본 클리닉 측은 상황이 심각한 것을 깨닫고 그를 연계된 병원으로 보냈다. CT 촬영을 진행한 결과, 레놀 씨는 얼굴에 심한 골절상을 당해 수술을 받아야 했다. 큰 수술비를 낼 수 없었던 레놀 씨의 사정에 클리닉과 병원에서 수술비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

레놀 씨는 “클리닉에 안 갔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클리닉에) 꼭 보답하고 싶어서 몸이 회복한 후 지금까지 클리닉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현재 레놀 씨는 클리닉을 찾는 환자들에게 필리핀어와 영어로 도움을 주고 있다.

봉제공장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한다는 레놀 씨의 휴일은 일요일 단 하루. 그럼에도 단 한 주도 안 빠지고 매주 일요일 클리닉으로 향한다. 그는 “안 하면 허전하다. 꼭 와야 하는 곳”이라며 “그리고 여기 있는 환자들 모두 다 ‘나’와 같은 사람이다. 타국에서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을 알기에 작은 일이라도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라파엘 클리닉 제공.
라파엘 클리닉 제공.

하루에 라파엘 클리닉을 찾는 이주노동자는 190여 명. 코로나19 전에는 300명의 환자가 다녀갔고, 엔데믹 이후 다시 그 인원이 늘고 있다. 남명부 국장은 “환자가 늘고 있는 반면, 일요일에 올 수 있는 전문의 수가 줄고 있어 안타깝긴 하다”며 “의료 봉사를 하고 싶으신 분들이 많이 오셨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설명했다.

의사였지만 현재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박희현 씨는 클리닉에서 가정의학과를 맡고 있다. 박 씨는 “의과대학 학생일 때부터 이곳에서 봉사했었다”며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하다가 지금은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여전히 환자를 치료하고 싶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더라. 그래서 다시 이곳에서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가족이 모두 한국에 계신 분들도 있지만, 타국에 있는 식구들을 책임지기 위해 먼 이곳까지 오신 분들도 많다”며 “그런 분들은 자신을 챙기기가 더 어렵다. 여기에는 당뇨병 환자들이 많은데, 약을 못 챙겨 먹는 경우가 있더라. 그래서 클리닉에 정기적으로 방문하게 해 상태 등을 꾸준히 보면서 식습관이나 기본 의학 상식들을 지속해서 알려드리고 있다”고 했다.

또한 “자주 찾아오시는 분들은 중 상태가 호전되는 분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덧붙였다.

라파엘 클리닉 제공.
라파엘 클리닉 제공.

꼭 의료 분야에 몸담은 사람들만 봉사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7년간 라파엘 클리닉에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이소망 봉사팀 단장은 평범한 직장인이다. 평소 봉사활동에 관심이 많던 중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이곳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이 단장은 “나만을 위해서 살다 보니 공허함이 생겼고 봉사를 시작했다”며 “라파엘 클리닉을 다니면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내가 생각했던 그 이상의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필리핀 분께서 전통 음식을 해오셨다. 우리나라 ‘약밥’ 같은 음식이었는데, 봉사자들과 맛있게 나눠 먹은 기억이 난다”며 “또 어떤 분들은 먼저 인사해 주시고 ‘저 기억나냐’고 다정하게 물어봐 주신다. 봉사하러 왔지만 도리어 따뜻함을 받고 가는 것 같다”고 회상했다.

코로나19 이후 현재 라파엘 클리닉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만 진료를 보고 있지만 내년부터는 진료 시간을 늘릴 계획이다. 일요일뿐 아니라 평일에 추가로 하루 문을 더 열 예정. 그렇게 되려면 더 많은 봉사자와 후원자가 필요하다.

남명부 국장은 “솔직히 말하면, 많은 분이 봉사하시고 후원해 주시면 좋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누구나 아프면 그에 합당한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남’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일 서러운 게 혼자 있을 때 아픈 것’이라고 하지 않나. 머나먼 곳에서 온 이분들은 얼마나 슬프고 외롭겠나. 저희 클리닉이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작은 손길을 내밀어 그분들에게 큰 위로를 전달하는 곳이 되길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따만사)은 기부와 봉사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위기에 빠진 타인을 도운 의인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공간을 만드는 사람들 등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숨겨진 ‘따만사’가 있으면 메일(ddamansa@donga.com) 주세요.
조유경 동아닷컴 기자 polaris2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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