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의 이상한 맥주잔이 주는 무한한 감동[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9일 23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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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을 알아본 고갱의 눈

프랑스 파리에서 전업 화가가 된 폴 고갱이 새로운 시야를 찾아 떠난 브르타뉴에서 그린 정물 ‘창문 앞 과일 그릇과 맥주잔’(1890년경).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프랑스 파리에서 전업 화가가 된 폴 고갱이 새로운 시야를 찾아 떠난 브르타뉴에서 그린 정물 ‘창문 앞 과일 그릇과 맥주잔’(1890년경).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민 문화부 기자
김민 문화부 기자
남태평양 타히티섬으로 간 후기 인상파 화가로 익숙한 폴 고갱(1848∼1903)은 원래 프랑스 파리에서 고소득을 올리는 주식 중개인이었습니다. 부업이었던 예술 작품 거래로도 짭짤한 수익을 내고 있었죠.

그러다 1882년 파리 증권거래소가 폐쇄 직전까지 가는 등 프랑스 경제가 최악의 상황을 맞으면서 그도 위기에 처합니다. 이런저런 일을 해봤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고, 결국 고갱은 1885년 덴마크에서 함께 있던 가족을 뒤로하고 홀로 파리로 떠나 전업 화가가 됩니다.

5년 뒤 고갱이 그린 정물, ‘창문 앞 과일 그릇과 맥주잔’은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닙니다.

수수께끼 가득한 그림
가장 먼저 거슬리는 건 오른쪽 아래 그려진 맥주잔과 칼입니다. 그 옆 과일은 입체감을 뽐내며 그림 밖으로 쏟아질 듯 묘사되어 있는데, 맥주잔 혼자 어두운 방 안에 놓인 듯 짙은 색입니다.

빛이 전혀 없어 마치 종이를 오려서 세워 놓은 듯 납작하게 그려져 있죠. 그 옆 칼 역시 기울어진 각도가 아니었다면 입체감을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과일이 있는 부분은 앞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보이는 반면 칼과 잔이 놓인 부분은 푹 꺼져 낯선 느낌을 자아냅니다.

게다가 테이블 바닥을 보면 그림은 더욱 이상해집니다. 맥주잔은 납작해서 같은 눈높이에서 본 모양인데, 테이블은 상판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입니다. 만약 이 그림이 사진이라면 낭떠러지처럼 그려진 상판에 놓인 모든 것은 아래로 흘러내려야만 합니다.

또 이렇게 테이블 뒤편에 바로 창이 있다면 테이블 위에 놓인 사물들은 역광을 받고 있겠죠. 맥주잔처럼 시커멓게 칠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과는 오른쪽 위에서 빛을 받아 양감을 마음껏 뽐내고 있습니다. 마치 ‘빛이 어디에서 오든 난 이 각도가 제일 예뻐’ 하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죠. 고갱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잔
폴 세잔이 1879∼1880년 그린 ‘과일 접시가 있는 정물’. 고갱이 소장해 파산 직전까지 팔지 않고 갖고 있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폴 세잔이 1879∼1880년 그린 ‘과일 접시가 있는 정물’. 고갱이 소장해 파산 직전까지 팔지 않고 갖고 있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고갱보다 10년 앞서 폴 세잔(1839∼1906)은 ‘과일 접시가 있는 정물’(1879∼1880년)을 그립니다. 이 그림도 재밌는 포인트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쏟아질 것 같은 테이블의 각도, 그 위 제멋대로 눈높이에서 그려진 사물들, 그림 아래 중앙에 굵게 그려진 검은 선까지. 균형 맞추기 게임을 하듯 치밀한 계산 위에 놓여 있습니다. 고갱 정물과 공통점을 찾자면 비스듬히 놓여 시선을 앞으로 잡아당기는 나이프, 납작해 벽지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유리잔이 눈에 띕니다.

고갱은 주식 중개인으로 일하던 1880년대 세잔의 작품 6점을 구입합니다. 그중 하나가 앞서 언급된 정물이었는데, 이 작품에 대해 ‘최고의 보석,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작품’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고갱은 1883년 이혼하면서 갖고 있던 많은 작품을 팔았는데, 이 작품만큼은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식 중개인으로 사는 삶을 버리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브르타뉴로 떠난 뒤 우리가 지금 만나는 정물을 그리게 된 것이죠. 고갱의 또 다른 초상화에서도 이 정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칼과 유리잔의 정반합은 이 그림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죠. 고갱은 세잔의 균형 게임에 커다란 인물을 더해 자신만의 버전으로 더욱 확장해 재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고갱과 세잔이 왜 인상주의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후기 인상주의를 열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작가들은 우리의 눈을 ‘빛을 받아들이는 기관’으로 보고, 빛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시각적 색채와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죠. 여기서 더 나아가 세잔은 우리의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보았습니다.

빛이 역광으로 비치더라도 내 마음속 사과는 오른쪽 위가 반짝이는 예쁜 사과일 수 있다는 것. 유리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 보면 동그란 윗부분만 보일지라도, 내 마음속에서는 옆선이 선명하게 보이는 납작한 도형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세잔이 과감하게 내디딘 걸음을 고갱은 마음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작품을 진심으로 즐기고 또 나아가 더 이상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던 오래된 일상을 뒤로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젖힐 수 있었습니다.

사소한 것이 주는 무한한 감동
영화 ‘마지막 4중주’(2013년)에는 첼로 거장 파블로 카살스(1876∼1973)가 젊은 연주자에게 울림 있는 말을 전한 일화가 나옵니다.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생각하는 젊은 연주자가 “내가 학생일 때 당신 앞에서 연주를 했고, 칭찬까지 해주었다”고 말하고는, 카살스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그때 왜 그런 무책임한 말을 했느냐”고 항의합니다.

그러자 카살스는 곧바로 오래전 젊은이의 연주를 재현하며 “당신의 이 부분이 좋았다는 걸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며 “나는 작은 것에서도 감동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상하게 놓인 나이프, 테이블 아래 시커먼 선, 납작한 맥주잔…. 그림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은 이런 사소한 것들입니다. 비록 사소하고 이상해 보여도 고갱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의 문을 열고 보면 그곳에서 무한한 감동과 기쁨이 쏟아져 나올 수 있으니까요. 고갱의 납작한 맥주잔에서 오늘은 그런 즐거움을 느껴보는 것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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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문화부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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