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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무비줌인]50대 신인 감독이 터뜨린 극장골 ‘올빼미’

입력 2022-12-08 03:00업데이트 2022-12-0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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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올빼미’에서 배우 류준열이 빛이 없을 때만 앞을 볼 수 있는 ‘주맹증’을 앓는 침술사 경수로 열연한 장면. NEW 제공영화 ‘올빼미’에서 배우 류준열이 빛이 없을 때만 앞을 볼 수 있는 ‘주맹증’을 앓는 침술사 경수로 열연한 장면. NEW 제공
손효주 문화부 기자손효주 문화부 기자
이대로 실패로 끝날 것 같던 인생 후반 추가시간에도 영화 같은 ‘극장골’이 이따금 터진다. 인생은 끝까지 살아봐야 안다는 흔한 말을 쉽게 놓지 못하는 이유다. 최근 영화계에도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 포르투갈전 못지않은 인생 역전골을 터뜨린 이가 있다. 그는 한국 팀이 16강에 갈 확률 11%보다 더 희박한 확률을 뚫었다. 영화계에 발을 들인 지 근 20년 만에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안태진 감독이다.

지난달 23일 개봉한 ‘올빼미’를 연출한 안 감독의 나이는 51세. 30대에 데뷔해 명성을 떨친 유명 감독들이 거장 반열에 들어서는 나이에 첫 영화를 찍었다. 50대 신인이 만든 영화는, 개봉하는 족족 참패한다는 ‘영화의 무덤’ 11월에 출격해 14일 만에 19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같은 달 9일 개봉한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208만 명)를 따라잡는 건 시간문제다. 제작비 3300억 원이 들어간 마블 대작의 총공세를 2주 뒤 등장한 90억 원짜리 영화가 꺾어 버렸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늦깎이 신인이 ‘언더도그의 반란’을 일으킨 셈이다. 호평 일색인 입소문이 퍼지면서 관객 수는 손익분기점 210만 명을 크게 웃돌 것으로 보인다.

2003년 ‘달마야 서울 가자’ 연출부에서 시작해 20년 가까이 감독 데뷔를 준비한 안 감독은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영화는 조선 16대 왕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1612∼1645)의 죽음에 관한 인조실록 기록을 토대로 상상력을 더한 스릴러물. 청나라에 인질로 갔다가 8년 만에 돌아온 소현세자는 수개월 만에 사망한다.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 약물에 중독돼 죽은 사람 같았다”는 짧은 기록을 개연성 탄탄한 서사와 가상 인물을 더해 강력한 힘을 지닌 이야기로 재탄생시켰다.

이야기 뼈대는 빛이 없을 때만 볼 수 있는 ‘주맹증’을 앓는 내의원 침술사 경수(류준열)가 어의 이형익(최무성)이 세자(김성철)에게 독침을 놓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 세자가 얼굴 등에 침을 맞고 피를 흘리며 발작하는 장면은 ‘올빼미 그 장면’이라 불릴 정도로 명장면이다. 역사서에 건조하게 기술된 몇 줄을 가장 정교하고도 충격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한 컷 한 컷 매만지기를 거듭했다. 안 감독은 긴장감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뒤 이 장면을 기점으로 긴장감을 폭발시킨다. 이후부터는 관객을 빨아들인 뒤 끝까지 함께 내달리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향해 전진한다. ‘빌드업 연출’의 정석이다.

경수의 텅 빈 눈빛이 촛불이 꺼짐과 동시에 초점 또렷한 눈빛으로 급변하는 모습과 이를 담아낸 카메라의 클로즈업,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부각하는 짧고 또렷한 음향, 경수의 시각처럼 흐렸다가 선명해지는 화면, 눈 귀 코 입에 선혈이 낭자한 세자의 기괴한 모습까지. 연기 음향 음악 편집 조명 촬영 미술 등 어느 것 하나 튀지 않고 하나로 어우러지는 이 장면은 영화가 종합예술로 불리는 이유를 입증한다.

독살을 사주한 이가 밝혀지는 순간 인조(유해진)의 등에 꽂힌 침 여러 개가 곧추서며 파르르 떨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침마저도 명연기를 펼치는 듯하다. 횃불과 촛불의 일렁임, 불길한 어스름을 조합해 빚어낸 긴장감, 고요함과 빠른 역습의 교차를 통해 휘몰아치는 전개, 현대 사회를 관통하는 묵직한 메시지 등은 그가 2005년 이준익 감독의 천만 영화 ‘왕의 남자’ 조감독으로 참여한 이후 17년을 헛되게 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생 후반 어렵게 잡은 기회인 만큼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할 수 없다는 인생 베테랑 신인의 내공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는 촬영 이틀 전까지 스태프와 배우들 의견을 반영해 시나리오를 계속 고쳤다. 창작의 고통 탓에 촬영 초반 장염에 걸려 열흘간 죽만 먹었다. 이 같은 투혼 덕분에 관객들은 사온 팝콘을 먹는 것도 잊은 채 영화에 빠져들게 된다.





안 감독은 ‘왕의 남자’ 이후 2, 3년 내에 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17년이 걸렸다. 긴 세월 눈뜨면 카페에 가 쓴 시나리오만 10여 편. 모두 투자를 못 받거나 캐스팅에 실패했다. 우유 배달 등으로 번 돈과 시나리오 공모전에 입상해 받은 상금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질 거라는 마음이 버티게 한 힘이라면 힘”이라고 했다.

월드컵을 계기로 유행어가 된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은 그에게 걸맞은 말이 아닐까. 그가 17년간 거듭한 건 실패가 아니라 언젠가 인생의 결정골로 연결시키기 위한 유효 슈팅이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골문을 향해 날려 온 유효 슈팅은 마침내 쉰이 넘어 극장골로 연결됐다. 감독 데뷔까지 누구보다 긴 여정을 달려온 그가 최종 스코어가 나온 뒤 펼칠 세리머니가 기대된다.

손효주 문화부 기자 hjs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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