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로 막막할 땐 ‘대동여지도’… “헛된 여정은 없다” 위로받아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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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3인, 박물관 유물서 치유 영감 얻어 ‘마음복원소’ 개장
국립중앙박물관과 8개월 협업
“오랜 세월 버텨온 유물의 힘”
사랑-건강 등 인생고민 힐링

“사슴 두 마리가 굴곡진 토기 위에 위태롭게 서 있어요.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꼭 제 모습 같았죠.”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1층 가야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권명규 씨(24)는 올해 2월 박물관을 찾았다가 이곳에서 5세기 가야 토기 ‘사슴 장식 구멍단지’를 만났다. 그는 “먼지 쌓이고 구멍 나고 산산조각 난 유물들은 마음을 다친 이들을 치유하는 힘을 지녔다”며 “유물에게서 얻은 힘을 내 또래 친구들에게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권 씨가 대학생 카피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광고회사 TBWA 소속 대학생들이 올해 2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협업해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마음을 치유하는 유물을 추천하는 ‘마음복원소’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다.


8개월간의 협업 끝에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달 27일 박물관 홈페이지에 ‘마음복원소’를 열었다. 홈페이지에서 현재 심리 상태를 확인하는 설문에 답하면 마음을 보듬어줄 유물들로 관람 코스를 추천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이에게는 ‘대동여지도’를 추천하며 “헛된 여정은 없다. 결국 모든 길은 이어진다”고 전한다. 인간관계로 힘들어하는 이에게는 ‘빗살무늬토기’를 보길 권하며 “먼지 묻고 때 묻은 흔적 덕분에 토기만의 무늬가 오히려 선명해 보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총 300여 점의 추천 유물을 선정했고, 유물별 문구 300여 개는 권 씨가 직접 작성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16일 기준 ‘마음복원소’를 방문한 이는 1만3000여 명에 이른다.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실에서 14일 만난 송화연 서예희 권명규 씨(왼쪽부터). 이들은 “박물관 앞 정원과 탁 트인 호수 
주변을 걸으면 숨통이 트인다. 친구들도 이를 경험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실에서 14일 만난 송화연 서예희 권명규 씨(왼쪽부터). 이들은 “박물관 앞 정원과 탁 트인 호수 주변을 걸으면 숨통이 트인다. 친구들도 이를 경험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권 씨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이끈 성신여대 산업디자인과 3학년 서예희 씨(22)와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송화연 씨(24)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4일 만났다. 이들은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길인지 고민하는 또래에게 오랜 세월을 버텨 온 유물의 힘을 전해주고 싶다”며 웃었다. 프로젝트 팀장을 맡은 송 씨는 “사랑, 돈, 인간관계 같은 문제에서 우리는 난관을 처음 겪는 경우가 많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려움을 겪는다”며 “홈페이지에 학업, 진로, 취업뿐 아니라 인간관계, 건강, 돈, 사랑 등 9가지 분야로 구성했고, 심리 상태에 따라 8점 정도의 유물이 추천되도록 했다”고 말했다.

사랑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응답한 이에게는 ‘고려시대 숟가락’을 추천하며 친한 친구에게 건네는 따뜻한 한마디처럼, 이렇게 위로한다. “친구야 밥 먹었니? 며칠째 한숨만 삼켰잖아. 이제 우리 밥 한술 먹자.” 돈 때문에 고민인 이들에겐 중국실에 소장된 ‘진나라 기와’를 소개하며 “대출받아 집 샀더니 기와 끄트머리만 내 거다. 나머지는 다 은행 거!”라고 유쾌하게 전한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어 주저하는 이에게는 조선시대 자 ‘진유척’을 알려주며 토닥인다. “그깟 자로 잴 수 있겠어? 우주만큼 커다란 네 가능성을.”

사이트를 디자인한 서 씨는 “마음을 닫고 방 안에 움츠러들어 있을 친구들을 박물관으로 이끌어내는 게 최종 목표”라고 했다. 그는 유물 추천 코스가 나오는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방문 예약’ 버튼을 넣었다. 설문 응답자가 박물관과 약속을 잡듯 달력에 방문 날짜를 예약하게 한 것이다.

이들은 또래에게 어떤 유물을 추천하고 싶을까. 권 씨는 조선시대 ‘측우기’를 꼽았다.

“입사시험 면접에서 계속 떨어지다 보면 내가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해가 쨍쨍한 날의 측우기처럼…. 그럴 때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아직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나의 때가 오지 않은 거니까요.”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마음복원소#격려문구#mz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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