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단의 추억-월드컵과 국민통합[이원홍의 스포트라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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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축구 슈퍼스타 지네딘 지단이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22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시상자로 참석하고 있다. 발롱도르는 
세계 최고 축구 선수에게 주는 상으로 올해는 카림 벤제마(프랑스)가 받았다. 지단은 은퇴 후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 감독을 
지냈다. 파리=AP 뉴시스
프랑스 축구 슈퍼스타 지네딘 지단이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22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시상자로 참석하고 있다. 발롱도르는 세계 최고 축구 선수에게 주는 상으로 올해는 카림 벤제마(프랑스)가 받았다. 지단은 은퇴 후 스페인 명문 레알 마드리드 감독을 지냈다. 파리=AP 뉴시스
이원홍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이원홍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2006년 7월 독일 월드컵 기간 때 일이다. 베를린의 한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 소년은 오로지 그를 보기 위해 몇 년 전부터 용돈을 아끼고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으로 표를 구했다고 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여운이 남아 있던 때였다. 많은 한국 팬들이 한국 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독일까지 찾아왔다. 그의 입에서도 당연히 한국 선수의 이름이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가 언급한 이름은 프랑스 대표팀의 지네딘 지단(50)이었다.

이해에 지단은 프랑스를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에까지 이끌었다. 1-1이던 결승 연장전 후반 5분.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을 가득 메웠던 7만여 명의 관중은 한목소리로 ‘우∼’ 하는 야유를 쏟아냈다. 이탈리아의 수비수 마르코 마테라치(49)가 경기장에 쓰러져 있었고, 심판이 달려와 지단에게 레드카드를 꺼냈다. 지단이 마테라치의 가슴을 머리로 들이받는 ‘박치기 사건’이 일어난 순간이었다. 후에 마테라치가 지단의 여동생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으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그 순간에는 지단이 왜 그랬는지 관중석과 기자석에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경기장에서는 지단의 퇴장에 항의하는 관중의 함성이 일방적으로 터져 나왔다. 아마도 대회 최고의 슈퍼스타가 물러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탈리아가 승부차기로 우승을 차지했고, 지단은 은퇴를 선언했다. 이 경기가 지단의 마지막 경기였다.

지단의 경기는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부드러운 동작과 강력한 힘, 자석 같은 볼 키핑 능력을 갖춘 그의 플레이는 프랑스 대표팀을 표현하는 ‘아트 사커’ 그대로였다.

그러나 먼 한국의 소년을 불러들이고, 세계 축구팬들의 가슴을 사로잡았던 지단의 인기와 영향력이 단지 경기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축구, 특히 월드컵이 만들어낸 통합의 아이콘이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프랑스 대표팀 22명 중에는 지단을 비롯해 릴리앙 튀랑(50) 등 이민자의 후손들 및 유색인 8명이 포함돼 있었다. 인종 갈등이 극심하던 당시 프랑스 극우진영에서는 이들이 프랑스를 대표할 수 없다면서 대표팀을 백인 위주로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난한 알제리 이민자의 후손이었던 지단은 이런 프랑스 대표팀의 플레이 메이커로 피부색을 초월한 선수단 단합의 구심점으로 활약했고, 프랑스에 첫 월드컵 우승을 안겼다. 그는 결승전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2골을 넣으며 팀의 3-0 승리를 주도했다. 다인종을 표현하는 무지개팀으로 불렸던 프랑스 대표팀은 통합의 상징이 됐다. 수많은 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인종이나 피부색과 관계없이 일치된 마음으로 대표팀을 응원했다. 이는 프랑스가 인종 및 이민자들을 둘러싼 갈등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또 다양성에 기초한 노력이 더 큰 결실을 얻을 수 있음을 확인시켰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 문화가 백인 중심에서 벗어나 좀 더 포용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최근 2022 카타르 월드컵 개막을 한 달여 앞두고 영국 공영 BBC가 월드컵 아이콘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지단을 첫 번째로 다룬 것은 아마도 그의 이 같은 역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단은 월드컵 우승 이후 2002 프랑스 대선에서 극우 정당 후보 장마리 르펜(94)이 “지단이냐 르펜이냐”며 다시 인종차별 슬로건을 들고나왔을 때 서슴없이 “르펜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더 이상 대표팀에서 뛸 수 없다”고 응수했다. 르펜은 자크 시라크 대통령(1932∼2019)에게 패했고, 지단은 이후에도 줄곧 극우 진영의 인종차별 정책과 맞섰다.

월드컵에서 우승한다고 저절로 국민통합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은 축구를 통해 사회가 통합된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이를 통해 나은 미래를 말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우리도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 때 이를 경험했다. 스포츠가 국민들의 정치적 시선을 돌리는 데 이용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적어도 이런 행사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응원하는 대상에 대한 애정의 확인이다. 이 같은 애정의 바탕 위에 분열된 국론의 소통이나 통합도 가능할 것이다. 현실 정치에서의 국론 분열이 극에 이른 때일수록 월드컵에서의 이런 기억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이원홍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bluesky@donga.com


#지단#월드컵#국민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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