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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어떤 일을 오래 한다는 것 [동아광장/최인아]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입력 2022-08-06 03:00업데이트 2022-08-0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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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햄릿’, 단역 노배우들 황홀한 향연
오래 한길 걸어온 이들이 주는 울림 커
본질 갖추고 견디면 새로운 길 열린다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가끔 경기 파주시 헤이리에 위치한 고전음악 감상실을 찾는다. 여러 일을 쉴 새 없이 해낸 몸과 마음에 고단하다 신호가 오면 이곳이 생각나고, 그러면 그곳에 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오디오로 음악을 들으며 그간 마음에 내려앉은 먼지를 씻어낸다. 엊그제는 근처 식당을 먼저 찾았다. 맛있는 음식을 상상하며 트러플 가재살 파스타와 새우 아보카도 샐러드를 주문했다. 한데, 주문한 지 몇 분 되지도 않아 식전 빵도 없이 음식이 나왔다.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역시나…오래전에 만들어 둔 듯 샐러드의 채소는 싱싱함과 거리가 멀었고 파스타도 영 신통치 않았다. 멋진 인테리어에 비해서도, 값에 비해서도 음식의 질은 많이 떨어졌다. 식당 문을 나오며 이 집은 얼마나 오래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본질을 소홀히 하는 곳은 식당이든 무엇이든 오래 살아남기 어려우니까.

연극 ‘햄릿’을 보면서는 정반대의 경험을 했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대표 배우들의 총출동! 햄릿 역의 강필석, 오필리아 역의 박지연, 레어티즈 역의 박건형 정도를 제외하면 평균 연령 70세가 넘는 노배우의 향연이라고나 할까. 박정자, 권성덕, 전무송, 손숙, 정동환, 유인촌, 김성녀, 윤석화…. 주역을 맡아도 모자랄 분들이 ‘무덤파기’나 배우 1, 2, 3의 단역을 맡아 후배들과 함께 무대에 선 거다. 죽음을 암시하는 듯 짙은 회색의 심플한 무대에 첫 대사가 울려 퍼졌다. “아, 춥다! 뼈가 시리게 추워!” 단역으로 출연한 박정자의 대사를 듣는 순간 나는 등을 곧추세워 바로 앉았다. 그이의 목소리엔 그런 힘이 있었다.

무대 미술도 좋았고, 배우들 연기도 좋았고 다 좋았지만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인사를 할 때였다. 단역의 노배우들이 주연 배우보다 무대 중앙에 섰고 관객은 죄다 일어나 휘파람과 박수로 화답했다. 오래도록 한길을 걸어온 분들에 대한 예우이자 연극의 하이라이트였다.

어떤 일을 하든 경력이 10년, 20년 쌓이고 나이가 마흔을 넘어서면 고민을 하게 된다. 이 일을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잘하는 후배가 속속 나오는데 앞으로도 나의 자리가 있을 것인지…. 업무의 중심에 서서 핵심 역할을 해온 사람이라면 고민은 한층 더 깊고 주연 자리에서 밀려날까 불안한 마음도 크다. 그런데 사람은 참 흥미로운 존재다. 계속 질문을 던지며 답을 찾다 보면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내가 잘하는 것보다, 혹은 내 아이디어가 채택되는 것보다 우리 팀 일이 잘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내가 주인공이 아니면 어떤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그걸로 감사하다…. 욕심껏 일하고 그만큼의 보상을 구하던 젊은 시절엔 쳐다보지도 않았을 생각들이 가슴을 두드리는데, 관점이 달라지면 중요한 역할이 아니어도 기쁜 마음으로 계속할 수 있게 된다.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감사해지는 거다. 물론 나도 그런 경험을 했다!

그렇게 30년쯤 오랜 시간 일하다 보니 어느 날엔가는 후배들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선배님은 거기 계신 것만으로도 힘이 됩니다. 오래 계셔 주세요!”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듣기엔 턱도 없는 소리지만 햄릿의 배우들은 충분히 그런 얘기를 들을 만한 분들이다. 어떤 역이든, 대사 한 줄의 단역이든, 조역이든 계속해서 무대에 올라 배우로 존재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후배 연극인은 물론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어떤 일을 오래 하게 되면 종래는 명성을 누릴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다고 내내 꽃길만 걷는 건 아니다. 해가 반짝반짝 빛나듯 일이 쫙쫙 풀리는 날도 있을 것이나 비 오고 바람 부는 날, 무지막지한 태풍에 뿌리까지 뽑힐 것 같은 두려운 시간도 있었을 거다. 배고픈 날도, 불안한 날도 있었을 테고. 그것들에 지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오래도록 한다는 것,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은 돌파하고 견뎌온 시간들의 열매다. 이걸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덕담으로 “꽃길만 걸으세요”라고 빌어주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어떤 일을 오래 한다는 것엔 엄숙함이랄까 그런 게 있다. 또 하나, 어떤 일을 오래 하려면 본질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하고 그 일에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인테리어가 좋고 주차가 편리해도 맛없는 식당을 찾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내 일의 본질은 무엇인가? 같은 일을 하더라도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그것이 그 사람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어떤 일을 오래 하는 데는 겹겹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최인아 객원논설위원·최인아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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