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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특파원칼럼/이상훈]고개 돌린 기시다에 실망할 필요 없는 이유

입력 2022-07-06 03:00업데이트 2022-07-06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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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뿌리쳤던 8년 전, 美 비판 초래 위기 자초
한일 관계-한미일 협력 주도권 잡을 기회
이상훈 도쿄 특파원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4년 9개월 만의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는 딱딱한 표정을 풀지 않으며 준비된 메모에만 눈을 꽂았다. 5월 도쿄에서 열린 미일 정상회담 내내 머금었던 미소와는 180도 달랐다.

한일 관계를 오래 지켜본 일본의 한 대학교수는 “8년 전 한미일 정상회담의 데자뷔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때도 다자회의가 무대였다. 2014년 3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를 계기로 박근혜 대통령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자리에 앉았다. 박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을 사이에 두고 서투른 한국어로 인사를 건넨 아베 총리를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인터넷에는 ‘통쾌했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아베의 굴욕은 위장술이었다. 한미일 협력 안보 체제를 구축하려던 미국으로서는 일본이 내민 손을 한국이 뿌리치는 장면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듬해 미국 국무부 정무차관이었던 웬디 셔먼 현 국무부 부장관은 “과거의 적을 비난함으로써 값싼 박수를 얻는 것은 쉽지만 이런 도발은 진전이 아니라 마비를 초래한다”며 한국을 비판했다.

아베 총리의 사상 첫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피폭지 방문 등을 거치며 미일 동맹은 업그레이드됐다. “한국은 언제나 사죄만 요구한다”며 일본이 미국에서 왜곡된 ‘한국 피로증’을 퍼뜨렸을 때 한국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언제나 같은 상황이 펼쳐지는 건 아니다. 마드리드 한미일 정상회담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한미일 협력을 세계 평화의 중심축으로 삼겠다는 한국과, 한일 관계 발전에 “노력하자”고 했는지 “노력해 달라”고 했는지 어미(語尾)를 따지고 있는 일본 중 누구와 더 통할지는 어렵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일본이 꽁한 모습을 반복할수록 국제 사회에서 한국이 내놓는 긍정적 메시지의 가치는 더 올라갈 수 있다.

기시다 총리로서는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웃으려야 웃을 수 없었다. 겉으로는 한국이 ‘답안지’를 가져오지 않아서였다지만 선거를 앞두고 입꼬리가 조금이라도 올라갔다가는 자국 내 보수 강경파의 비판을 받았을 것이라는 게 일본 내 해석이다.

한국을 비난하고 매도해야 몸값이 올라가는 일본 정치 환경에서 웬만한 정치가는 섣불리 한국과 손을 잡자고 말하지 못한다. 경제가 성장하고 수차례 정권이 바뀌면서 ‘일본 콤플렉스’를 조금씩 털어내고 있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한국이 동해에 띄운 조사선 하나에 “용납할 수 없다”며 파르르 떨고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문화유산 추천을 두고 “역사전쟁을 피하지 말자”며 부추긴다. 한일 관계를 자존심이 걸린 한판 승부로 대하다가 한국이 범한 실책을 이젠 일본이 저지르려 하고 있다.

일본은 한일 갈등에 대해 “공은 한국에 있다”고 책임을 떠넘기지만, 바꿔 생각하면 한일 관계 변화의 주도권이 한국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윤석열 대통령과 눈을 마주치기 꺼린 기시다 총리를 향해 한국을 무시했다며 비난할 필요도 없다. 일본을 향한 한국 내 다양한 여론에 귀를 기울이되 동아시아를 비롯한 글로벌 정세를 정확히 판단해 한미일 협력 등 과제에 주도권을 놓지 않고 적극적으로 임하면 된다. 자국 지지층의 눈치만 보며 국제 정세를 외면하는 외교의 결과가 어떤지는 지난 수년간 한국이 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배웠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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