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의 섬, 욕지도[김창일의 갯마을 탐구]〈76〉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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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얼마 전, 욕지도로 가족 여행을 갔었다. 통영에서 뱃길로 32km, 1시간쯤 걸리는 섬이다. 해안 둘레길을 드라이브한 후 과거 고등어 파시(波市)로 명성이 자자했던 자부포(좌부랑개)에 들렀다. 아내와 아들에게 파시를 설명하려다가 그만뒀다. 낡은 건물이 즐비한 곳으로 데려와서 지루하게 해설까지 하는 건 눈치 없는 행동인 듯했다.

조선시대 욕지도는 통제영에서 관리하던 사슴 목장이 있어 사슴뿔을 공납하던 섬이다. 민간인 거주가 조선 말까지 허용되지 않았다. 1887년부터 섬에 정착할 수 있게 되자 일본 어민들이 먼저 관심을 가졌다. 풍족한 어족 자원과 정박하기 좋은 천혜의 포구, 조선인들이 터전을 잡고 있지 않아서 이주가 수월했다. 또한 부산, 통영과 인접해 있어서 판매와 유통에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춰 일본 어선의 중요한 근거지였다. 1921년 욕지도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292명이나 됐다. 식민지 이주어촌인 자부포에는 순사 주재소와 우편소, 소학교, 신사가 건립됐고 목욕탕, 이발소, 상점, 요리점, 당구장, 술집 40여 개 등 파시촌이 형성돼 인파로 북적였다.

파시는 물고기를 잡은 어선에서 곧바로 매매가 이뤄지는 수상시장이다. 파시에 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택리지(1751년) 등에 나타날 정도로 연원이 깊다. 현대적인 유통망이 확립되기 전, 파시를 통해서 주요 수산물이 유통됐다. 상선은 어선이 물고기를 잡을 때까지 주변에서 기다렸다가 바다 위에서 어획물을 곧바로 구매했다. 상선이 포구에 도착하면 어물전에 예속된 객주가 사들였다. 각지에 퍼져 있던 객주는 구입한 해산물을 염장하거나 말려서 어물전으로 보냈다. 이동 경로는 지역에 따라 달랐다. 서해와 남해에서 잡은 조기, 준치, 삼치, 멸치 등과 각종 젓갈류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수로를 통해서 한양과 개성으로 보냈고, 동해에서 잡은 명태 등은 말이나 소를 이용해 육로로 운송했다. 이렇게 모인 해산물은 중간상인, 소매상, 행상 등을 통해서 전국으로 유통됐다.

물고기잡이가 활발한 곳은 상당한 규모의 파시가 열렸다. 연평도, 위도, 흑산도는 조기 파시가 성행했고 덕적도, 신도, 임자도는 민어 파시, 나로도는 삼치 파시로 유명했다. 추자도와 부산 대변은 멸치 파시, 울릉도와 영덕은 오징어 파시가 있었다. 욕지도 고등어 파시는 1920년대부터 시작돼 역사가 짧았으나 어선 500여 척, 운반선 290여 척이 조업할 정도로 대규모 고등어 집결지였다. 고등어 어군이 점차 제주도 남쪽 먼바다로 이동하고, 유통 방식이 변화됨에 따라 1960년대 자부포 파시촌은 쇠퇴했다.

욕지도는 고등어 집결지 자리를 부산공동어시장에 내줬지만, 지금은 횟감 고등어 산지가 됐다. 100∼150g 정도의 고도리(고등어 새끼)를 잡아서 가두리에서 1년을 키워서 고가에 판매한다. 덕분에 요즘은 내륙에서도 어렵지 않게 고등어 회를 맛볼 수 있다. 민간인이 거주하지 않던 사슴 목장에서 고등어 집결지로 번창했으나, 고등어 어업 쇠락으로 침체됐다가 다시 고등어 활어 산지가 된 섬. 여행 중에 잠깐 머문 자부포 파시촌에서 고등어와 함께한 흥망성쇠 100년의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고등어 비린내 깊이 스민 섬이 욕지도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욕지도#고등어#자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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