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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고고한 말의 초상[이은화의 미술시간]〈199〉

이은화 미술평론가
입력 2022-01-27 03:00업데이트 2022-01-2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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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스터브스 ‘휘슬재킷’, 1762년경.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가면 잘생긴 말 한 마리를 만날 수 있다. 18세기 영국 화가 조지 스터브스가 실물 크기로 그린 말 그림이다. 세로 3m에 달하는 거대한 캔버스에 말 혼자 단독으로 등장한다. 기수도 없고 배경도 그려지지 않았다. 미완성 그림인 걸까? 화가의 의도인 걸까?

스터브스는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 없지만 말 그림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죽은 말을 직접 해부하며 쌓은 그의 해부학적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1766년에는 ‘말 해부학’이라는 책도 출간했다. 그 어떤 동물화가보다 정확하고 섬세하게 그렸기에 승마를 즐기는 귀족들의 그림 주문이 쇄도했다. 그에게 최고의 명성을 안겨준 이 그림은 로킹엄 후작이 의뢰했다. 그는 영국 최고 부자 중 한 사람으로 총리를 두 번이나 지낸 정치인이자 경마 마니아였다.

그림 속 모델은 후작의 경주마 휘슬재킷이다. 윤기 나는 밤색 몸에 크림색 갈기와 꼬리를 가진 이 멋진 말은 세계 경주마의 3대 시조에 속하는 고돌핀 아라비안의 손자다. 순수 경주마 혈통이지만 휘슬재킷의 기록은 그리 특출 나지 않았다. 열 살이던 1759년 은퇴를 위해 마지막으로 출전한 경주에서 우승했을 때 처음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렇다면 로킹엄 후작은 휘슬재킷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초상화를 의뢰했을까? 아니다. 수많은 말들을 오랫동안 사육했던 그는 휘슬재킷의 빼어난 외모가 순종 아라비안 말의 표본이라는 것을 깨닫고 초상화로 남기고자 했다.

스터브스는 수개월을 가까이서 관찰한 끝에 말의 외모뿐 아니라 심리까지 포착한 초상화를 완성했다. 경주마로 평생 고된 훈련을 받았던 휘슬재킷은 은퇴 후에야 비로소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 터. 누구보다 말을 잘 이해했던 화가는 기수도 배경도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아름다운 말의 존재 자체를 부각시켰다. 뒷다리로 선 채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는 말은 고고한 눈빛으로 우리에게 묻는 듯하다. 당신은 자유로운가.

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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