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잠 안오는 밤, 귀에 꽂힌 ‘21세기 처용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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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4일 월요일 맑음. 처용가.
#348 070 Shake ‘Guilty Conscience’(2020년)


임희윤 기자
임희윤 기자
‘새벽 4시 잠들지 않아∼’(오왠 ‘오늘’ 중)

이런 노래를 새벽 4시에 듣는 건 마치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양화대교를 건너며 듣는 것과 흡사하다.

요즘 통 잠을 못 잔다. 진짜 새벽 4시에 스포티파이를 열었다가 인공지능님이 쏜 화살을 심장에 맞았다. 감성적인 노래를 죄다 때려 박은 5시간짜리 플레이리스트 ‘4:00 am Groove’를 메인 화면에서 조우한 것이다. 랜덤 재생. 하필 첫 곡으로 크루셜스타의 ‘유학’이 당첨된다. ‘유학이라도 가면 좀 나아질까/유학이라도 가면 좀 나아질까/유학이라도 가면 좀 나아질까…’ 창밖의 서울 야경은 무심히 졸고 있다.

이럴 때 정신 드는 노래는 따로 있다. 마침 밤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멜랑콜리 범벅이다.

‘새벽 다섯 시에 들어와 보니/내가 본 걸 믿을 수 없네/네가 다른 사람 몸 위에…’

설마…. 신라 향가 ‘처용가’? 아니다. ‘Guilty Conscience’. 미국 싱어송라이터 ‘070 셰이크’가 작년에 낸 노래이니 그 무대가 서라벌일 리 만무하다. 경주는커녕 1997년 뉴저지에서 태어난 Z세대 가수다.

‘서라벌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닐다가/들어와 잠자리를 보니/가랑이가 넷이구나’의 ‘처용가’ 정서를 070 셰이크는 깊은 밤 네온처럼 울렁이는 신시사이저, 쿨하나 서글픈 가창으로 기막히게 풀어냈다. 송골매가 7집(1987년)에 AC/DC나 주다스 프리스트 스타일로 실은 ‘처용가(처용의 슬픔)’와는 결이 사뭇 다르다.

그러나저러나 이미 큰일이 벌어진 걸 뭘 어쩌겠나. 070 인터넷전화로 이 밤에 호소할 데도 없다. 더구나 저 예명의 070은 뉴저지주의 우편번호일 뿐….

070 셰이크는 앨범에서 ‘Guilty Conscience’ 바로 앞에 이 노래를 배치했다. ‘The Pines’. 비극은 예정된다. 19세기 애팔래치아 산맥 일대에서 전래된 민요 ‘In the Pines’(솔숲에서)의 2020년 버전이다.

‘어젯밤 어디에서 잤니… 솔숲, 솔숲, 솔숲, 볕도 안 드는 곳….’

치정의 역사가 유구하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처용가#오왠#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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