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자의 관심법과 진정성의 힘[오늘과 내일/문권모]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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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만 봐도 ‘진짜’ 가려내… SF도 나름의 사실감 가져야

문권모 채널A콘텐츠편성전략팀장
문권모 채널A콘텐츠편성전략팀장
기획 회의 등 방송국의 콘텐츠 회의에 들어가다 보면, 일반인 입장에선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의외의 단어’가 곧잘 등장한다. 이 단어는 교양 프로그램이 아닌,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회의에서도 자주 이슈가 된다. 바로 진정성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진정성 얘기를 하면 “방송은 어차피 다 연출 아닌가” “화면을 통해 보는데 어떻게 진정성을 알아챌 수 있는가”와 같은 반응이 나온다. 그런데 나도 TV 프로그램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무언가 어설프거나 꾸민 듯한 장면이 나오면 시청자들이 바로 알아채서다. 궁예의 관심법(觀心法)처럼 요즘 시청자들은 ‘방송국놈들’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왜 그럴까. 개인적으론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이때 뭐가 진짜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독버섯 같은 가짜를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 시청자들은 진짜 콘텐츠가 가짜보다 더 큰 재미와 감동을 준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흥미롭게도 인간을 비롯해 공동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공정성이란 개념도 본능적으로 추구한다. 공정성은 집단생활의 경쟁구도 속에서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 2003년 과학 잡지 ‘네이처’에 실린 논문(‘Monkeys reject unequal pay’)에 명확한 사례가 나온다. 똑같은 과제를 수행한 두 원숭이 중 한 마리에게는 맛이 밍밍한 오이를, 다른 한 마리에게는 달콤한 포도를 줬다. 오이를 받은 원숭이는 어느 순간 실험을 진행하던 사람에게 오이를 던져버렸다.

채널A에서 ‘아이콘택트’를 연출하는 김남호 PD에게 프로그램의 진정성에 대한 질문을 던져봤다. 김 PD는 “시청자들이 여러 매체를 통해 진짜를 봤기 때문에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는 눈이 생긴 것 같다”고 답했다. 매체의 발달에 따라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의미다. 이어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이 ‘쇼(show)’가 아니라 ‘예능’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런 시대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달 중순 아이콘택트에 어린이보호구역 내 교통사고로 숨진 김민식 군의 부모님이 출연한 적이 있다. 프로그램도 이슈가 됐고, 방송 다음 날 열린 대통령과 국민의 대화에 김 군 부모님이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진은 적극적인 홍보를 자제했다고 한다. 혹여 프로그램의 진정성이 훼손될까 우려해서다.

진정성은 시청자들이 자신의 눈을 통해 직접 보지 못한 것을 다루는 사극이나 공상과학물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런 장르의 작품들은 그 나름의 진정성, 즉 정확한 고증이나 그럴듯한 설정을 통해 시청자들을 설득한다.

이를 설명하는 문학비평용어가 핍진성(逼眞性)이다. 핍(逼)에는 핍박하다, 강제로 받아내다 등의 뜻이 있다. 핍진성은 쉽게 말해 ‘진실성을 짜내어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성질’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동전 크기만큼만 모발을 남기고 머리를 미는 청나라 초기의 변발이나, 지나치게 넓어 보이는 도포의 소맷자락 등 고증의 정확성으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역사 전문가가 아닌 일반 관객들도 작품의 사실성이 높다는 느낌을 본능적으로 받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새해를 앞두고, 앞으로 방송 프로그램을 검토할 때 진정성을 항상 맨 앞에 두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충분히 좋은 취지를 가진 프로그램인데도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몇몇 작품이 생각나 아쉽다. 기회가 닿는 대로 제작진에게 프로그램의 진정성을 최대한 살려 보자고 건의해야겠다.

문권모 채널A콘텐츠편성전략팀장 mikemoon@donga.com
#진정성#공정성#핍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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