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개심 유전자’ 극복한 獨-佛 “상대방 이해 시도 악마화 말아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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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30000호 특별 대담]
‘엘리제조약 55주년’ 주한 獨-佛대사가 말하는 ‘화해의 조건’
“대화 자체가 금기 되면 화해는 실패… 국민에 정책 설명하고 참여 유도 필요”

《‘엘리제조약’(독일-프랑스 우호조약) 55주년을 맞은 양국의 주한 대사가 ‘동아일보 지령 3만 호 기념’ 특별대담을 가졌다. 슈테판 아워 독일 대사(왼쪽)와 파비앵 페논 프랑스 대사는 ‘화해의 조건’으로 “과거 잘못에 대한 가해자의 책임 있는 태도”를 강조했다. 또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대화 자체를 ‘악마화’하고 금기시하면 화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조언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프랑스인 약 200만 명이 숨졌다. 독일에 점령당하는 굴욕적인 기간도 있었다. 가해국 독일도 약 1000만 명을 잃었다. 양 국민 사이에 ‘적개심의 유전자’가 뿌리내렸다는 말도 있었지만 이제 프랑스와 독일은 명실공히 친구 이상의 관계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1일 엘리제조약(독일-프랑스 우호조약)을 개정해 협력을 심화하겠다고 발표하자 양국 의회가 바통을 이어받아 조약 체결 55주년 기념일인 22일 ‘신(新)엘리제조약’ 체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같은 날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국회의장은 파리의 프랑스 의회에서 프랑스어로, 프랑수아 드뤼지 프랑스 국회의장은 베를린의 독일 의회에서 독일어로 각각 연설했다. 드뤼지 의장은 양국 관계를 ‘커플을 넘어선 가족’이라고까지 평가했다. 프랑스와 독일 우호관계의 기념비적 이정표인 엘리제조약은 그렇게 양국의 축복 속에 55번째 생일을 맞았다. 훈풍은 서울에서도 느껴졌다. 25일 서울 주한 프랑스대사관저에서 만난 파비앵 페논 주한 프랑스대사(50)와 슈테판 아워 주한 독일대사(57)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양국의 우호관계는 일상에 녹아 있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은 “상황이 달라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면서도 이웃 나라들과 역사 문제로 여전히 갈등을 겪는 한국에 대해 조심스레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 레지스탕스의 아들이 건넨 ‘장 모네’ 코냑 한 병

―55주년을 맞은 엘리제조약의 의미는….

▽페논 대사=서로에 대한 혐오를 멈추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전쟁이 비로소 끝났음을 알렸고 유럽 통합의 주춧돌이 됐다고 평가한다.

▽아워 대사=양국 가슴속에 있던 적개심 유전자를 없앴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더 넓게 보면 유럽의 배타적 국수주의 시대를 종결지었다고 본다.

―두 나라가 ‘친구 이상’임을 피부로 느꼈던 순간은….

▽페논=프랑스와 독일이 영토 분쟁을 벌였던 로렌 지방의 메츠가 고향이다. 굴곡진 역사에도 지리적 특성상 독일과 교류하는 사람이 많다. 독일어는 내가 처음으로 배웠던 외국어다. 사실 대부분의 프랑스 엘리트는 독어를 제1외국어로 친다.

▽아워=한국에 오기 전 유럽연합(EU) 대외관계청(EEAS)에서 근무했다. 벨기에 브뤼셀을 떠나게 되자 한 동료가 코냑 한 병을 선물해줬다. 아버지가 레지스탕스로 독일군과 싸우다 숨진 프랑스 외교관이었는데 ‘장 모네’(유럽 통합의 주역으로 평가받는 프랑스 외교관. 그의 가문이 코냑 사업을 했고 후일 유럽 석탄·철강 공동체 초대 집행위원장이 됐다) 브랜드의 코냑을 선물로 준 것이다. 뭉클했던 순간이었다.

○ “상대방 이해하려는 시도 ‘악마화’ 말아야”

양국이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결정적 비결을 묻자 페논 대사는 기자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1차 대전 베르됭전투(1916년) 전사자들의 유해가 안장된 두오몽 봉안당에서 1984년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헬무트 콜 독일 총리가 추모와 화해의 의미로 손을 맞잡은 모습이 담겨 있었다. 양국에서 총 30만 명이 사망한 전투였다. 페논 대사는 “이들(미테랑과 콜) 같은 프랑스와 독일의 커플 그리고 유럽의 아버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페논 대사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구상했던 모네 위원장과 당시 프랑스 외교장관이었던 로베르 쉬망, 그리고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총리 등의 이름을 언급했다. 이어 이들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 바로 미테랑과 콜, 그리고 현재의 마크롱과 메르켈이며, 양국의 친선은 전쟁이 한창이던 때부터 화해를 꿈꿨던 사상가들과 이를 계승한 지도자들의 안목 덕이라고 평가했다.

―양국 경험에서 알게 된 역사 화해의 필요조건을 정리한다면….

▽아워=무엇보다 가해국이 (과거) 범죄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는 게 중요하다. 여기에 상대방의 손을 잡아준 피해국과 화해의 비전을 갖춘 지도자들이 더해졌기에 역사 화해가 가능했다고 본다.

▽페논=가장 중요한 건 정부와 제도 차원을 넘어선 사람 대 사람의 대화였다. 학생 교류부터 다양한 종류의 전시회, 공동으로 설립한 예술 TV 채널까지 일상 속의 협력과 교류를 위해 구체적인 사업이 끊임없이 진행됐다.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 화해 노력의 대표적인 사례가 엘리제조약 체결의 결과로 설립된 ‘프랑스-독일 청소년사무국(OFAJ)’이다. 1963년 설립 이후 지금까지 840만 명 이상의 양국 학생이 OFAJ의 언어·문화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지금도 매년 20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서로를 배우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 특별히 건넬 조언이 있다면….

▽아워=상대방 국가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국의 시도마저 악마화한다면 그 어떤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 빌리 브란트 전 총리는 “대화를 한다는 건 상대방과 동의한다는 뜻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대화 자체가 금기가 될 때 화해는 실패한다.

▽페논=각자의 사정은 물론 다르다. 하지만 역사 화해는 결국 시민들의 지지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시민들에게 명확히 정책 방향을 설명하고 그들이 실제로 (정책 구상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프랑스 독일 양국은 불편할 수 있는 현대사 주제도 정면대응하고 있다. 두 나라 연구진이 공동집필한 독일·프랑스 공동 역사교과서는 이미 출판된 지 12년이 됐다. 1945년 이후를 다룬 교과서가 2006년 나왔고 세계대전을 다룬 교과서는 2008년 출판됐다.

▽페논=양국 학자들이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역사를 보는 관점 차이가 있다는 점을 학생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양국의 상반된 해석을 교과서에 모두 담았다.

▽아워=공동의 미래를 위해선 역사를 바라보는 인식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 프랑스와 독일, 단일팀 만든다면?

양국은 겨울스포츠 강국이다.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에서 전체 메달 수 기준으로 독일은 6위(19개), 프랑스는 8위(15개)에 올랐다. 우리가 한일전을 기다리듯 그들은 독-프전을 기다릴까.

―기대하고 있는 라이벌전이 있다면….

▽아워=올림픽은 선수들 개인의 경쟁이다. 중요한 건 도핑 없는 클린 올림픽 아니겠나.

▽페논=근대올림픽 창시자 피에르 쿠베르탱(프랑스인)이 ‘올림픽은 승리가 아닌 참가하는 데 의의가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럼 응원하는 상대국 선수를 꼽아 달라.

▽아워=남자 바이애슬론 종목에 프랑스의 마르탱 푸르카드 선수가 매우 강하다고 들었다. 물론 독일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 독일 선수를 더 응원하게 될 거다. 하지만 독일 선수 다음으로는 프랑스 선수, 그 다음으로는 유럽 선수를 응원하겠다. 물론 한국도 응원한다. 아이스하키 대표팀이 결승에 올라간다면 정말 좋겠다.

▽페논=독일도 바이애슬론이 강하다고 알고 있다. 독일의 라우라 달마이어를 응원한다.

▽아워=독일과 프랑스가 올림픽에서 힘을 합한다면 (경기를) 휩쓸지 않겠나(웃음).

인터뷰가 끝나고 관저가 아름답다고 페논 대사에게 말을 건넸다. 관저를 설계한 한국 건축가 김중업이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제자라는 대답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사실 독일의 내 집에서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건물이 보인다. 독일과 프랑스의 교류가 그만큼 활발하다”고 아워 대사가 말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법한 일상에서도 양국을 잇는 ‘연결고리’를 발견해 내려는 모습에서 ‘적개심의 유전자’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기재 기자 record@donga.com

○엘리제조약이란…

△ 개요
― 1963년 1월 22일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콘라트 아데나워 독일 총리가 프랑스 파리의 엘리제궁에서 양국의 화해와 협력을 위해 체결한 조약.
△ 주요 내용
― 수백 년 지속된 경쟁 관계를 종결짓는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는 양국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역사적인 일임을 확신한다 고 선포(공동선언문).
― 각종 회담의 정례화(정상회담 연 2회, 외교 국방장관회담 연 4회).
― 청소년 교류 위한 ‘프랑스-독일 청소년 사무소(OFAJ)’ 설립.

:: 슈테판 아워 주한 독일대사(57) ::
― 1997년 주사우디아라비아 독일대사관 정무 공보부장
― 2004년 주이탈리아 독일대사관 정무부장
― 2013년 EU 대외관계청(EEAS) 과장
― 2016년 주한 독일대사 부임

:: 파비앵 페논 주한 프랑스대사(50) ::
―2002년 주유럽연합(EU) 정치안보위원회 프랑스대표부 차석
―2007년 외교부 정책안보국 유엔 국제기구 인권과장
―2012년 대통령비서실 외교보좌관
―2015년 주한 프랑스대사 부임
#엘리제조약#슈테판 아워#파비앵 페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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