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최재경]사법 과잉의 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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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지지 말라”는 어른들 말씀… 재판 피하려는 유교적 전통
사법은 분쟁 원만히 해결하는 최선의 수단이 아니다
정치권 조정 등 다양한 방법 필요
수사·재판이 ‘만능 해결사’ 되면 사법부 독립성은 위협받을 것

최재경 객원논설위원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최재경 객원논설위원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요즘 신문과 방송을 보면 재판과 수사, 즉 사법 절차에 관련된 내용이 많다. 그런 세태를 반영한 탓인지 영화와 드라마를 보아도 판사 검사 변호사 경찰관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 드물 정도다. 원래 수사 드라마와 법정 드라마가 대세인 미국을 방불케 한다.

이런 현상은 정상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 서민들의 삶은 사법제도와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행복한 인생은 경찰서 출입도, 법정 출입도 한 번 해보지 않고 죽는 것이라 하지 않는가.

동양의 역사적 전통은 사법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가능하면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다. 국가기관의 순서를 정할 때 재판을 담당하는 ‘형조(刑曹)’는 6조 중 다섯 번째였고, ‘하늘과 땅 및 사계절(천 지 춘 하 추 동)’의 여섯 가지로 기능을 나눌 때도 ‘사법’은 계절의 끝자락인 가을, 즉 추관이었다. 형벌 업무를 담당하고 법률을 다루는 율사가 중인 계급의 세습 직업이었던 것도 이런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흔히 가르쳐 온 인생 교훈에 ‘척지지 마라’는 말이 있다. ‘척(隻)’은 고대 동양 법제상 ‘피고’를 의미하는 것이니 살아가면서 남과 송사(訟事)를 벌이지 마라는 뜻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은 상당한 칭찬이다. 유교사상 자체도 소송을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공자가 노나라의 최고법관인 사구(司寇)가 되자 주위에서 이제 어떤 송사든 잘 처결될 것이라고 기대가 컸다. 하지만 공자는 ‘송사를 판결하는 것은 남들도 나만큼은 하겠지만, 나는 반드시 먼저 송사가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고소한 사건을 맡게 되자 재판을 진행하지 않고 둘을 같은 감옥에 가둔 뒤 방치했다. 부자 간 다툼은 가정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일이지 국가가 관여해 법률로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구속된 지 3개월이 지나자 결국 부자가 서로 고소를 취소해 종결됐다고 한다.

물론 전제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가 지배하던 고대 동양사회와 현대 법치국가 대한민국은 전혀 사정이 다르다. 오늘날 헌법과 법률이 정한 사법절차에서 분쟁이 해결돼야 한다는 원칙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우리 헌법에는 사법권의 기능과 독립 보장이 명백하게 규정돼 있다. 사법은 ‘구체적 법률 분쟁이 발생한 경우 당사자로부터 쟁송의 제기를 기다려 독립적 지위를 가진 기관이 제3자적 입장에서 무엇이 법(法)인가를 판단하고 선언함으로써 법질서를 유지하는 국가 작용’이다. 즉 국민 생활 속에서 법적 분쟁이 생겼을 때 법에 따라 종국적으로 해결하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법이 모든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최선의 수단은 아니다. 그것은 속성상 ‘최종적·소극적·수동적 해결의 장’이라는 본질적 제약을 지닌다. 아직 유교 윤리의 영향력이 엄존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한계는 더욱 뚜렷할 수밖에 없다. 사회적으로 진상을 가리고 시비곡절을 따져야 할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자율적 해결이 우선이고 효율적이다. 정치문제는 정치권에서, 경제문제는 경제 분야에서 당사자와 전문가들이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상이다.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국회와 언론의 감시와 비판 아래 유관 부처와 전문기관의 조사와 중재 또는 조정을 거쳐 결론을 내면 된다. 이런 다양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해결을 시도해 봐도 도저히 다른 길이 없을 때 최종적으로 수사와 재판 등의 사법절차에 맡기는 것이 좋다.

사법권은 엄격하게 독립돼야 하고 그 반대로 자율적 자제 또한 필요하다. 기관이나 기능의 독립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기관·기능을 독립시켜야 지켜질 수 있는 헌법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즉 사법권의 독립은 (그것을 보장함으로써) 공정한 재판을 통해 인권 보장과 법질서 유지에 만전을 기하려는 수단적 헌법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입법과 같이 법 형성 작용을 하는 것도 아니고 행정처럼 적극적 작용도 불가능한 ‘소극적·수동적 판단’ 위주의 사법기능은 비판에 취약하고 방어능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만능 해결사나 약방의 감초처럼 자주 나서서 적극적으로 작동하다 보면 자칫 적대와 불만세력에 직면할 수도 있다. 독한 약은 최후에 처방하는 법이다. 우선 급하다고 아무 병에나 써버리면 내성이 생기고 약효가 떨어진다. 정작 필요할 때 제 기능을 못하면 어디에 쓰겠는가. ‘사법 과잉의 시대’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최재경 객원논설위원 법무연수원 석좌교수
#사법 과잉의 시대#척지지 마라#사법권 자율적 자제#사법권의 독립#법이 모든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하는 최선의 수단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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