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원지수]퇴사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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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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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지수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원지수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그 회산 진짜 좋은 회사였어∼ 나와 보니까, 알겠더라고.”

예상했던 대로다. 얼마 전 직장을 옮긴 그는 세상 다 초월한 얼굴로 맥주를 쭉 들이켜곤 이제는 익숙한 저 대사를 쳤다. 내 어깨를 도닥이며 “넌 꽉 붙어 있어”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고. 아무 말 없이 빈 잔을 채워 건네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은 갓 구운 빵. 세상에서 제일 좋은 회사는 어제 그만둔 회사라더라.’

가끔 다니던 회사를 나온 친구들을 만날 때면 빠지지 않는 이야기는 “나와 보니 거긴 좋은 회사였다”는 것이다. “그 팀장이 뭐 또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월급은 좀 적었지만, 거기선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은 칼퇴할 수 있었는데” 등등.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잡아먹기 직전이었던 나쁜 회사는, 어느 순간부터 ‘그래도 그 정도면’ 좋은 회사가 되어 있었다.

뭐지, 내 기억으론 분명 거기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살도 빠지고, 머리도 숭숭 빠지던 사람들인데. 이를 바드득 갈며 ‘이놈의 회사’를 저주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왜 마치 옛 애인 그리워하듯 저리도 아련한 얼굴이 되는 걸까? 눈에서 멀어졌는데, 마음에선 오히려 가까워지는 신기한 현상. 첫 회사를 ‘나와 보니’, 나는 비로소 그 복잡한 심경을 알게 되었다.

삶에서 어느 정도 익숙해진 무언가를 떠나 새로운 변화를 준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그곳에서 쌓아 온 ‘경험치’를 얼마간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당신이 몇 년간 열과 성을 다해 게임 캐릭터를 하나 키웠다고 하자. 처음에는 변변한 아이템도 요령도 없이 어설프게 시작했지만, 이젠 꽤 높은 경험치에 당신 나름대로 자신 있는 영역, 고락을 함께하는 동지도 생겼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게임이 완전히 리셋되고, 훨씬 더 재미있는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다면 어떨까? 그 대신, 애써 키운 캐릭터도 그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키워야 한다는 전제하에.

새로운 도전에 끌려 업그레이드를 선택하긴 했지만, 아마도 한동안은 자꾸만 내게 더 익숙한 이전 방식과 제법 노련했던 과거의 내가 자꾸만 눈에 밟힐 것이다. 아는 맛이 제일 무섭다고, 아무리 맘처럼 되지 않던 일이나 숨소리마저 싫었던 사람들도, 낯선 곳에서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을 때면 그저 다 좋았던 것만 같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또 새로운 곳에 적응하게 될 테고, 어쩌면 더 센 전투력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지금 당장’은 아니기에 일단은 어색하고 힘든 것이다.

“그 회산 좋은 회사였다”는 말은 후회, 혹은 과거 미화의 모습으로 비치기 쉽지만, 사실은 그건 그만큼 나의 ‘영역’이 넓어졌다는 의미다. 이전에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 좁은 범위에서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면, 퇴사 후 겪게 되는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일을 보는 관점이 다양해지면서 예전엔 미처 보지 못했던, 다른 좋은 점들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엔 조급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더라도, 그것들은 내가 만든 변화로 인해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된 덕이라 생각하고 조금은 여유 있게 지켜보면 어떨까.

눈에 보이는 경험치를 잃었다 하더라도, 내가 내 안에 쌓아 둔 경험치가 어디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다시 원래의 레벨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다. 그러니 가던 방향으로 좀 더 힘주어 걸어가 보기로 한다. 어려움은 지나갈 것이고, 새로움은 곧 배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에겐 내공이 있으니까. 퇴사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은, 이전 회사 좋았다는 작은 깨달음 하나가 아니라, 퇴사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그 나머지의 세상이다.
 
원지수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퇴사#퇴사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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