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세번 보면서 장면-각본 달달 외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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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장애인 이수연씨를 통해 본 국내 ‘배리어프리 영화’ 현주소

배리어프리(barrier-free). ‘장벽을 허물자’는 이 운동은 1974년 시작됐다. 장애인과 노약자가 문턱 없이 다닐 수 있는 건축물을 짓자는 내용의 유엔 보고서에서였다. ‘장애인이 편하면 모두가 편한 사회’란 구호 아래 배리어프리 영화도 만들어졌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해설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 제공으로 구성되는 이 영화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이주민, 약시·난청을 가진 어르신도 함께 즐길 수 있다.

국내에서도 2008년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고 2012년 국내 최초로 일반영화와 동시 개봉한 배리어프리 영화 ‘달팽이의 별’이 나왔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지금 장벽은 무너졌을까. 20일은 장애인의 날. 청각장애인 이수연 씨(28)가 겪고 있는 장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혼자 허물기엔 높았던 장벽

태어날 때부터 들리지 않았다. 한글을 익혔지만 타인과의 대화는 쉽지 않았다. 자연스레 홀로 지내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봤다. 혼자여도 덜 외로울 수 있었다.

배우 메릴린 먼로와 말런 브랜도, 영화 ‘패왕별희’와 ‘파이트 클럽’을 좋아하지만 한국 영화나 배우엔 관심이 없다. 자막이 없는 한국 영화는 그림의 떡이기 때문이다. 그럴 바엔 좋아하지 않는 게 낫다 여겼다. 볼 수 없는 것보다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

외화도 마찬가지다.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서 톰 크루즈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는 장면에선 추측만 할 뿐이었다. 여럿이 대화하는 장면이 나올 땐 열심히 입 모양과 자막을 맞춰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영화 포스터를 봤다. 영화 ‘왕의 남자’(2005년)였다. 색감이 예뻐 눈길이 갔다. 1000만 관객이 들었다던데…. 보고픈 마음에 ‘미친 짓’을 하기로 결심했다.

영화는 총 세 번 봤다. 처음 볼 때 장면을 다 외우려고 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대사를 긁어모았다. 장면 순서대로 대사를 배열해 각본을 만들었고 통째로 외웠다. 그리고 영화를 두 번 더 봤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비장애인이면 두 시간에 끝났겠지만 꼬박 나흘이 걸렸다. 애써 좋아하지 않는다고 외면했던 한국 영화다. ‘그토록 대단한 걸 놓치고 살았다니….’ 집에 오는 내내 펑펑 울었다.

○ 배리어프리 영화 도입됐지만 여전히 높은 장벽

한국인의 연평균 영화관람 횟수는 4.22회(2015년)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장애인은 한 해 100명 중 7명만이 배리어프리 버전으로 온전히 영화를 감상한다. 동아일보DB
한국인의 연평균 영화관람 횟수는 4.22회(2015년)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장애인은 한 해 100명 중 7명만이 배리어프리 버전으로 온전히 영화를 감상한다. 동아일보DB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헌법 제11조 1항) 하지만 이 씨가 속한 세계에서 이 조항은 한 줄 문장에 불과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5년 청각장애인은 약 26만 명, 시각장애인은 약 25만 명이다. 하지만 같은 해 배리어프리 영화를 본 장애인 관람객은 3만8000여 명에 불과하다. 중복관람을 감안하면 시청각 장애인 100명 중 단 7명 이하가 ‘장벽 없는 영화’를 감상한 셈이다.

영화 편수도 절대적으로 적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만들어진 배리어프리 영화는 160편 안팎. 한 해 개봉 영화가 1520편(2016년 기준)인 데 비하면 턱없이 적은 수치다.

장벽을 허무는 데 큰돈이 드는 건 아니다. 배리어프리 영화 한 편을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은 평균 1500만∼2000만 원. 지난해 한국 상업영화 한 편의 평균 제작비는 45억500만 원, 홍보·마케팅 비용은 18억8000만 원에 이른다. 김수정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 대표는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선진국처럼 영화를 만들 때 배리어프리 버전을 의무로 제작하도록 법제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17일 이 씨는 서울 종로구의 한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 ‘시간 위의 집’을 보기 위해서다. 한국 배우만 나온 영화라 여느 때처럼 자막이 없었다. 스릴러물이었기에 바람이나 비명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장면이 많았다. 영화 중후반, 암전된 화면이 약 20초간 이어졌다. 영화가 끝난 후에야 그 장면이 내레이션으로만 꾸며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0개월 만에 본 한국 영화였다. 12년 전 ‘왕의 남자’를 봤을 때와 달라진 건 없었다. 누구에게나 장벽은 있다. 하지만 이 씨의 그것은 더 높고 견고하기만 하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배리어프리#barrier-free#배리어프리 영화#시각장애인ㅡ청각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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