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훈의 법과 사람]국정원 黑역사와 ‘철수 정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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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논설위원
최영훈 논설위원
2002년 10월 25일 ‘국가정보원의 휴대전화 도청’ 사실이 동아일보 1, 3면에 보도됐다. 국정원은 보도가 나간 당일 본보를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그때부터 ‘X파일 사건’을 계기로 국정원이 도청을 시인할 때까지 3년 가까이 본보는 법적 공방에 시달렸다.

국정원장 맹세해도 못 믿어


당시 취재팀을 구성해 파고들던 기억이 새롭다. 몇 개월을 고생했지만 주변 정황 외에 결정적 증언 확보에 실패했다. 그때 국정원은 권력기관으로서의 위세가 대단했다. 높은 벽을 상대로 아무리 두들겨도 문이 열리지 않아 무력감이 심했다. 당시 신건 국정원장은 보도 하루 전 국회 정보위에서 “세계 어느 정보기관도 휴대전화 도청 기술은 없다”며 “도청 사실이 드러나면 심판받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결국 임동원 전 국정원장과 함께 쇠고랑을 찼다. 국정원은 소송을 취하했다.

검찰 수사 결과 도청 사실이 속속 확인됐다. 노태우 정권 때의 도청 조직인 미림 팀은 김영삼 정권 때로 이어졌고, 집권 초 이 팀을 해체했던 김대중 정권 역시 새 도청 조직을 만들었다. 한술 더 떠 33억 원을 들여 휴대전화 도·감청 장비인 R2와 카스(CAS)를 개발해 도청을 했고 도청 대상도 18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정보기관의 공작정치와 도청은 동전의 양면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도청이 이어졌다는 것에 국민의 충격은 컸다. 그래서 국정원의 해킹 의혹이 제기된 이후 이병호 국정원장이 국회 정보위에 나가 “대(對)국민 사찰은 없었다”고 직을 걸고 맹세했지만 소용없다. 대북(對北) 정보 수집에만 사용했다는 해명도 믿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다.

지금은 북한의 지뢰 도발에 이은 포격 도발로 준(準)전시상태다. 북한이 눈에 보이는 도발의 부담을 감안해 사이버전을 감행할 우려도 나온다. 과거 어느 때보다 국정원이 대북 정보 활동과 사이버전 대비를 강화해야 할 때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은 해킹 원본자료 제출을 요구하며 국정원의 손발을 묶는 시도를 하고 있다.

당내 기구인 ‘국민정보지키기위원회’ 위원장인 안철수 의원이 최근 국정원의 자료 제출 거부로 무력감을 토로한 심정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2년 전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민간인 무차별 도청 사실이 폭로됐을 때 상·하원은 정보기관의 업무와 활동에 관한 비밀 보호의 원칙을 지켜준 바 있다. 안 의원이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는 자세에 변함이 없다면 북한과 사이버전을 수행하는 정보기관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

안철수, 상인 감각 키워라

얼마 전 안 의원은 당 공동대표 때 지방선거 공천 과정에서 겪은 우여곡절을 “가장 밑바닥까지 보게 됐다”는 말로 회고했다. 그의 눈빛에는 권력의지가 엿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인보다는 학자의 인상이 강하다. 사이버 세계에선 안보와 자유가 충돌하는 일이 잦다. 그럴 때 균형감각을 갖고 처신할 줄 알아야 한다. ‘선비의 비판정신’과 함께 ‘상인의 현실감각’을 지녀야 좋은 정치인이 될 수 있다.

안 의원은 주요 정치 고비 때마다 발을 빼는 일이 잦아 ‘철수(撤收) 정치’라는 수모를 당한 바 있다. 또 한 번 그런 말을 듣더라도 정보기술(IT) 전문가답게 국정원 해킹 의혹 조사를 질질 끌지 말고 신속하게 마무리 짓는 용기가 필요하다.

최영훈 논설위원 tao4@donga.com
#국정원#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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