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종찬]독립운동 정신 되살리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3일 03시 00분


코멘트

광복 70주년 릴레이 제언<상>

이종찬 우당이회영장학회 이사장
이종찬 우당이회영장학회 이사장
올해는 광복 70주년 되는 해로 감회가 새롭다. 1945년 나는 상하이에 있는 빈한한 다세대주택에 살고 있었다. 8월 10일경 노타이에 흰 셔츠를 입은, 몸은 마르고 빈약했지만 눈은 빛나는 분이 급히 다락방에 숨어 있는 아버지를 만났다. 한참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후 그분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다락방에 들어가 보니 두 분이 필담을 나누었는지 재떨이에 종이를 태운 재가 수북했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기분이 좋았다. “왜놈들이 이제 곧 망할 거야. 우리도 곧 귀국하게 되겠지.” 과묵하신 아버지께서 처음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찾아왔던 손님은 일제가 현상수배 중인 정화암 선생임을 나중에 알았다.

며칠 후 그 손님이 전해준 소식대로 광복이 되었다. 어린 나도 무엇인가 달라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네 아이들과 다투기만 하면 그 부모들이 쫓아 나와 이렇게 말했다. “왕궈누(亡國奴)라 할 수 없군.” 이런 멸시는 뺨을 맞는 것보다 더 괴로웠다. 그런데 이제는 나라 없는 망둥이가 아니라 나라를 찾은 백성이 됐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그해 10월 충칭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길에 상하이에 들렀다. 5000여 교민들이 언제 준비했는지 태극기를 들고 나와 환영하는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때 김구 주석은 힘주어 연설했다. “미국의 대통령 나사복(羅斯福·루스벨트)이 영국 수상 구길(球吉·처칠)을 만나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습니다.” 청중은 카이로 선언 설명임을 이해하면서도 완고한 그분의 한문식 발음에 히쭉히쭉 웃었던 기억이 난다.

임정 요인들은 미군기로 귀국길에 올랐지만 상하이에 남아 있던 가족들은 그래도 희망에 차 있었다. 곧 자주독립의 정부가 들어서게 될 것이라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국토의 남북에 미소 군정이 들어서 각각 ‘갑’이 되었고 독립운동 세력은 ‘을’에 불과했다. 이어 세계적인 동서냉전이 밀어닥치면서 민족의 구심점은 점점 사라지고 원심력만 작용한 결과 남북에 각각 이질적인 정부가 수립되었다. 분단에 이어 국가가 분열된 것이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독립운동 세력들은 민족의 구심점을 찾고자 좌우합작도 시도해 봤고 남북협상의 길도 선택해 봤다. 하지만 사상적으로 갈린 원심력이 워낙 강력하여 민족지도자들이 중간에서 구심력으로 버티기는커녕 모두들 희생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분단된 북쪽은 무력으로 남침을 감행하였고 씻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민족의 극단적 분열을 초래하고 말았다. 국토 분단, 국가 분단, 민족 분단을 차례로 거치면서 통일의 길은 점점 멀어져 갔고 70년 동안 남북이 서로 적대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그뿐인가. 남한은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하여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남남 갈등, 보혁 갈등, 세대 갈등, 지역 갈등으로 하루도 잠잠한 날이 없다. 독립운동 때도 이런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자정 노력과 협상, 타협의 과정이 있었다. 이를테면 임정의 ‘건국강령’을 보면 보수와 진보의 정신이 모두 담겨 있다. 1948년 대한민국 헌법 제정 당시 이 건국강령은 원용되었다.

독립운동 세력의 이런 정신을 오늘에 구현하기 위하여 7월에 뜻있는 인사들이 참석해 ‘임시정부기념관’을 세우기로 했다. 이곳에는 임정에 참여했던 모든 분들의 정신을 수렴코자 한다. 이승만도, 김구도, 이동녕도, 안창호도, 여운형도, 김원봉도, 지청천도…. 독립운동가들의 피땀 어린 노력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은 후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민족화해의 광장이 우리의 대한민국을 더욱 건강하게 발전시킬 것이라 확신한다.

이종찬 우당이회영장학회 이사장
#독립운동#광복 70주년#정화암#임시정부기념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