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손택균]이해받을 의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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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균 문화부 기자
손택균 문화부 기자
“중학교 2학년 학생이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써라.”

수습기자 때 몇몇 선배가 금언처럼 강조한 말이다. 문장이 전하는 취지에 공감하지만 단어 곧이곧대로 동의하진 않는다. ‘중학교 2학년생의 이해력’이라는 기준이 모호할뿐더러 쓰는 이의 개성을 억누르는 전제로 작용하기 쉽다. 아는 바를 얄팍하게 늘어놓거나 허세로 치장한 단어를 쓰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하라는 뜻으로 새기고 있다. 거듭 새겨도 평생 부끄러움 끌어안고 지내야 할 거라 생각한다. 옳다고 판단해 글로 적은 내용을 행하는 바에 온전히 끌어들일 만큼의 인성을 다듬지 못한 탓이다.

기자 일을 하게 된 것이 고마운 순간은 존경심 불러일으키는 누군가를 간혹 만날 때다. 고령의 명망가일 때도, 평범한 청년일 때도 있다. 공통점은 중언부언하지 않는 거다. 그렇다고 구설 염려에 찌든 일부 연예인처럼 무성의한 단답형 대꾸만 내놓지도 않는다. 하는 일에 대한 고민을 기름기 없는 언어로 소통하려 애쓰는 이는 누구든 존경스럽다.

며칠 전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22명이 번역한 책에 대한 기사를 준비하다가 데스크에 건의해 글감을 교체했다. 읽기를 포기한 부분은 이 문장이다. “르코르뷔지에의 영상이 최신 전자음악을 유기적 생명과 기술 발전의 종합체로 양식화한 방식은 ‘모더니즘의 자연사’에 대한 스미스슨의 비판적 평가의 대상이 된 바로 그 휴머니즘의 파토스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같은 날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시작한 전시에 내걸린 기획 의도 설명은 이랬다. “참여 작가들은 삶의 실천적 문제를 고민하는 문화 연구자이자 기록 생산자들로, 제작이 가지는 공유가치와 사회적 기능에 주목하는 동시에 연대와 실천을 꾀한다.”

배움과 이해력이 부족한 탓을 염치없이 밖으로 돌린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미술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에 놓인 글에 대한 이해의 의무는 어느 쪽이 짊어지는 게 옳을까. 적어도 세금으로 운영하는 공공 미술관이 내놓는 글은 권위 의식의 방패막이 어구로 빼곡한 학위논문과 달라야 한다고 본다. 작가와 작품에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과 독자 앞에 정리되지 못한 외국어 문장을 기계적으로 번역해 들이미는 건 오만한 태만이다.

작가는 작품을 내놓을 뿐 관람객과의 소통은 전시기획자만의 몫이라 여기는 듯한 작가도 간혹 있다. 그런 마음으로 완성한 작품이라면 집에 놓고 혼자 보면 된다. 글로든 작품으로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그로 인한 비난 또는 칭찬을 받아 삼켜야 할 처지를 선택하는 행위다.

주말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아직 크게 유명해지지 않은 대중음악 가수의 공연이 열렸다. 글로 맺힌 마음에 적절한 음이 얹어져 울렸다. 미술관의 언어가 그런 가사를 닮을 수는 없을까. ‘엄청난 의미와 가치를 가진 작품임을 꼭 알려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인한 어깨 힘만 좀 빼면 아마 가능할 거다. 그 너머 공부는, 관람객 몫이다.

손택균 문화부 기자 sohn@donga.com
#글#어구#소통#문장#이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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