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한국 천주교의 최대 아이러니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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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위해 기도한다”는 교황 방한에 불유쾌한 정의구현사제단
인간 존중과 박해 항거의 길 걸어온 전통 거스르는 꼴
이들이 북한 주민 위해 기도할 날 올까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8월 14∼18일)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얼마 전 교황의 건강 이상설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번 주 바티칸 교황청 관계자들이 사전 준비를 위해 내한하면서 일각의 우려는 사라졌다. 그는 아시아 국가 중에서 첫 방문지로 한국을 택했다. 여러 나라를 함께 찾는 것이 아닌 한국 단독 방문이다. 한국을 중시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방한 날짜가 다가오면서 환영 열기가 고조되고 있으나 한쪽에서는 냉랭한 분위기도 감돌고 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함세웅 신부는 지난달 한 기고문에서 ‘교황의 꽃동네 방문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교황은 방한 첫날 박근혜 대통령을 만난 뒤 충북 음성 꽃동네와 충남 당진 솔뫼성지 방문 등의 일정을 보낼 예정이다. 함 신부는 ‘꽃동네는 일종의 큰 강제수용소 모형이어서 복음 정신과 안 맞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황이 제주 강정마을과 밀양 송전탑 저지 현장을 방문했으면 한다’고 밝혔다.

진보 성향의 평신도 단체인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연합 등도 “박근혜 정권은 국가기관의 불법적인 대선 개입을 통해 탄생했다”며 “교황 방한이 정권의 정당성을 공인해 주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방한 첫날 박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 못마땅한 듯하다. 이들은 교황이 정의구현사제단을 만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방한을 진심으로 환영하기는 하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교황 방한을 정권 이익에 이용하려는 불순한 시도” 등의 거친 표현을 주저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여러 의견이 공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가 걸어온 역사를 보면 이런 입장의 중심에 있는 정의구현사제단은 참으로 특이하고 이질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한국은 자생적으로 천주교의 싹을 틔우고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세계에서 보기 드문 사례다. 초기 신자들은 중국 베이징의 성당을 스스로 찾아가 세례를 원했으며 미사를 집전해 줄 신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늘날 신자 500만 명의 교세로 성장한 한국 천주교는 교황청에는 ‘기적의 역사’다. 역대 교황들이 한국을 ‘아시아 선교의 문’이라고 부르며 무한한 애정을 표시해 온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초창기 신자들은 양반 가운데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들과, 통역관 등으로 이뤄진 중인 계급이 중심이었다. 신분 낮은 신자들을 포용했고 여성이 60% 이상을 차지했다. 계급과 남녀 차별이 엄존하던 시대에 천주교의 평등과 인권 사상에 사람들은 마음을 열었다.

현대에 들어와 천주교는 북한 정권 출범과 함께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북한은 1946년 토지개혁을 한다며 종교단체의 모든 토지를 강제 몰수했다. 북한 기록에 따르면 불교 천주교 등 4124개 종교단체가 4500만 평의 토지를 빼앗겼다. 토지 몰수만이 아니었다. 1949년 5월 원산의 덕원수도원에는 북한 공산당원들이 들이닥쳐 독일인 성직자와 한국인 성직자들을 체포했다. 이들 가운데 23명은 교도소에서 총살됐고 13명은 굶어죽었다. 평양교구 함흥교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후 북한에서 종교는 사실상 소멸했다. 천주교에선 북한을 ‘침묵의 교회’라고 부른다.

1784년 이승훈에 대한 최초의 세례로 시작된 한국 천주교의 230년 전통은 인간을 존중하고 차별에 반대하며 박해에 맞서 싸워 온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앞으로의 사명 중에는 ‘침묵의 교회’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일도 있다. 그러나 정의구현사제단은 ‘박근혜 퇴진’은 외쳐도 인권과 종교 말살을 빚은 북한 정권을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신부는 북한의 연평도 포격을 옹호하고 나섰다. 북한의 김일성 시신 앞에서 “장군님 조금만 오래 사시지 아쉽습니다”라고 말한 신부도 있었다. 함세웅 신부는 장애인들이 살고 있는 음성 꽃동네에 대해 “강제수용소이므로 교황이 가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이 말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북한이라는 ‘초대형 강제수용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런 정의구현사제단의 존재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 기막힌 아이러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올해 2월 염수정 추기경을 만나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한국을 찾아오는 이유 중에도 북한에 대한 배려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이 북한 주민을 위해 기도하는 날은 과연 올 수 있을까.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프란치스코 교황#북한#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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