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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Narrative Report]60년만에 여는 말문… 천만번 가슴에 새긴 보고싶다는 한마디

입력 2013-12-26 03:00업데이트 2013-12-2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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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봉산군이 고향인 허섭 씨가 20일 자신의 집에서 카메라 앞에 앉아 ‘이산가족 영상편지’를 찍고 있다. 이날 허 씨는 “북한에 있는 동생들에게 보낼 것”이라는 말에 옷장에 모셔뒀던 한복을 꺼내 입었다. 파주=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나 원 참.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 오늘 같은 날 말썽인지….” 자는 둥 마는 둥 새벽녘에 잠을 깬 허섭 씨(81)는 조바심이 났다. 일주일 전 영하 10도의 날씨에 눈발까지 흩날리던 때에도 쌩쌩하게 돌아가던 보일러가 갑자기 멈춰선 게 못마땅했다. 오늘은 서울에서 귀한 손님이 찾아오는 날인데…. 아침부터 목장갑을 끼고 보일러 이곳저곳을 들춰 보지만 도통 살아날 기미가 없다. 20일 오전 8시. 대한적십자사(한적)의 이산가족 영상편지 촬영팀이 첫 일정을 위해 허 씨 댁을 찾았다. “얼어 죽을 판에 촬영 준비는 무슨, 그냥 대충 이대로 찍으면 되지.” 허 씨는 짐짓 퉁명스럽게 맞이했지만 눈이 내려앉은 듯 하얗게 센 할아버지의 머리칼은 ‘8 대 2’ 가르마로 정갈히 빗겨 있었다. 》  

○ 황해도 봉산군 동산면 조양리 1707번지

허 씨는 지난해 한적에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7만여 명 가운데 영상편지 제작 대상자로 선정된 1만6800여 명 중 한 사람이다. 오늘은 올해 대상자 2000명의 영상편지 촬영 마지막 날이다. 당초 계획은 매년 5000∼6000명씩 촬영할 예정이었지만 예산 문제로 규모가 줄었다.

허 씨는 전날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간밤에 멈춰선 보일러 때문만은 아니다. 60년 전 전쟁통에 헤어진 형제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을 테고, 동생 윤이 놈은 살아있겠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에이 자식 놈들은 영상편지인지 뭔지를 신청해서 속을 끓이게 하는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속절없이 긴 밤이 지나갔다.

“할아버지, 오늘 찍는 영상은 나중에 남북관계가 좋아지면 북한으로 보낼 거예요. 북쪽 동생이나 친지들이 볼 거니깐 가장 멋지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허 씨는 촬영팀이 다그치자 귀찮다며 손사래를 치다가 결국 옷장 앞에 선다. 그는 칠순잔치 사진 속에서 입었던 진갈색 한복 저고리를 꺼내 들었다. “영상에는 상체만 나오니 바지는 두툼한 거 입으셔도 돼요. 감기 걸리시겠네.” 촬영팀의 만류에도 허 씨는 아무런 대꾸 없이 얇은 한복 바지를 입고 버선까지 챙겨 신었다. 그의 왼쪽 손목에는 어느새 금빛 시계도 채워져 있었다.

‘황해도 동산면 조양리 1707번지.’ 60년이 지났고 그 사이 경기 서울 등지를 숱하게 떠돌았는데도 황해도 고향집 주소는 잊어지지 않는다. 꿈에서도 잊지 못할 그리운 곳이다.

“전쟁 났을 때 열아홉 살이었는데 군대 안 가려고 도망 다니다가 결국 동네 치안대를 했지. 그때는 경찰이고 뭐고 없어서 우리가 빨갱이들 잡아들였어.”

순조롭던 촬영은 뜻하지 않은 난관을 만났다. “할아버지, 이 영상은 북한으로 가는 거니깐 ‘빨갱이’ ‘공비’ 뭐 이런 표현은 쓰시면 안 돼요.” VJ의 지적에 허 씨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빨갱이’가 나오는 대목에서 말이 끊어져 몇 번의 NG가 났다. 답답한 허 씨는 짜증 섞인 푸념을 했다. “그럼 대체 무슨 말을 하라는 거요? 이래가지고 북한에 전달되기는 하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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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만에 여는 말문…보고싶다는 한마디


○ 60년 만에 얼굴 비치려니 만감 교차

카메라 렌즈와 홀로 마주 앉아 말을 하라고 하면 누구나 긴장하기 마련인데 이산가족들은 오죽하랴.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눈감기 전에 꼭 한 번 만나고픈 사람에게 전한다고 생각하니 촬영하기도 전에 발가락 끝부터 떨려온다.

촬영팀의 역할은 그래서 중요하다. 삼각대를 설치하고 그 앞에 어르신을 앉혀놓고 ‘녹화 버튼’ 누르는 게 전부가 아니다. 같은 질문과 지적을 반복하고 두세 번, 때로는 될 때까지 연습을 시킨 뒤 영상편지에 필요한 내용들을 담아내야 한다.

두 번째 촬영자 임봉순 씨(67)는 정장으로 갈아입고 카메라 앞에 앉았지만 도통 입이 떼어지지 않는다. 처음 촬영팀을 맞을 때 보여준 웃음기는 싹 사라지고 이마에는 연신 땀방울이 맺혔다. 계속된 NG를 지켜보던 임 씨의 아내는 안절부절 거실을 반복해서 왔다 갔다 했다. 결국 임 씨는 ‘커닝’이라도 할 요량으로 몇 글자 갈겨쓴 종이를 가져와 카메라에 안 잡히는 발밑에 두고서야 말을 이었다.

“아홉 살 되는 해에 내가 살던 경기 연천군에 북한군이 와서 마을 사람들을 북쪽으로 모조리 데리고 갔어. 나랑 할머니는 염병(장티푸스)에 걸려 북한 놈들이 떼어 놓고 가는 바람에 남한에 남겨졌지. 그때 어머니가 어린 동생을 업고 ‘금방 데리러 올게’ 하고 가셨는데 아직까지 안 와….”

영상으로도 북측 가족들이 임 씨를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는 함께했던 추억들을 영상에 담아야 한다. 9세 이전의 기억을 60년이 지나서 떠올리자니 떨리는 입술은 더 바짝바짝 말랐다.

“집 앞에 배나무가 있었어. 아버지 목말을 타고 그걸 따먹은 기억이 나네. 아, 맞아. 살구나무에서 떨어져서 머리가 깨진 적도 있었지. 헤어질 무렵에는 북한군이 우리 집 소를 잡아먹은 것도 생각나네.”

마지막으로 영상편지에 담긴 임 씨의 바람은 소박하고 간절했다.

“저는 임일재 안정오 씨의 장남 임봉순입니다. 우리는 잘살고 있습니다. 집에 소도 있고, 차도 있고 일요일에는 손주들이 와서 놀아요. 다 함께 모여서 한번 식사라도 즐겁게 하고 싶습니다.”

○ 영상편지가 유서로 남지 않기를

오후 4시가 가까워서야 세 번째 촬영자 윤음전 씨(81)를 만났다. 평소 좋지 않았던 윤 씨의 심장은 이날따라 더 콩닥콩닥 뛰었다. 60년 전 어린 남동생의 손을 잡아 주지 않은 게 오늘따라 더 가슴을 후벼 팠다.

대부분의 어르신은 가족들과 헤어질 당시 기억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뒤죽박죽 말을 이어가기 일쑤다. 자기소개를 하다 보면 현재 가족 얘기로 구렁이 담 넘어가고, 헤어진 날 상황을 말해 달라고 하면 이후 한국에서 고생한 얘기까지 고속도로를 내달리듯 쉬지 않고 계속된다. 10분짜리 영상을 뽑아내는 데 실제 촬영은 1시간을 넘는 이유다. 윤 씨도 촬영팀이 방 안에 짐을 풀자마자 쉴 틈을 주지 않고 사연을 쏟아냈다.

“원래 고향은 황해도 해주인데 … 헤어질 때는 인천에 살았지. 난 열아홉 살이라 한일방직에 다녔고 … 남동생 흥구는 학익초등학교 2학년이었어. 공부를 얼마나 잘했으면 우등상도 탔다니깐. 그리고….”

정식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는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던 윤 씨는 막상 카메라에 빨간불이 들어오니 숨만 가빠져서 말을 잇지 못한다. “자, 심호흡 크게 한번 하시고 다시 하시죠.” 이름, 나이, 고향 세 가지를 말하는 자기소개를 마치는 데 10분이 걸렸다. 헤어질 때 상황을 설명할 때는 감정이 격해져 자리에서 일어나 당시 기억을 온몸으로 끄집어냈다.

“어느 날 북한군이 내려온다 하기에 나는 아버지 손잡고 물 건너 용매도로 떠나기로 했어. 한참 걸어가는데 남동생이 ‘누가 나도 데려가’ 하면서 절름절름 따라오잖아. 그때 내가 ‘너는 어려서 못 간다’며 돌려보냈어. 내가 미쳤지. 어리긴 뭘 어려. 그때 데려왔으면 북에서 그 고생 안 할 텐데. 그것도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말이야.”

영상에 남긴 마지막 얘기는 우리의 말과 단어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얼마나 부족한지를 새삼 느끼게 했다.

“보고 싶구나. 많이 보고 싶다. 한번 보고 싶어서 그렇다. 내 나이 벌써 여든을 넘었다. 나이를 먹으니 더 조급해진다. 궁금하고 보고 싶다.”

윤 씨는 마당까지 나와 촬영팀을 배웅했다. 쉽사리 촬영팀을 보내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60년 동안 담고 있던 말을 카메라 앞에서라도 쏟아내니 후련했지만, 혹시 살아있을지 모르는 동생 걱정이 앞섰기 때문.

“흥구(동생)가 헤어질 때 나를 따라나서려고 했다는 걸 북에서 알면 어디 무서운 곳으로 끌고 가는 거 아냐? 요새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자기 고모부까지 처형했다는 소식 들으면 남겨둔 동생들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정말 괜찮겠지?”

한적은 영상편지를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보관했다가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북측에 전달할 계획이지만 언제가 될지 기약이 없다. 그래서 영상편지는 ‘이산가족들의 유서’라고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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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마친 이관호 PD는 그동안 수십 편의 이산가족 영상편지를 찍으며 겪은 잊지 못할 추억을 들려줬다.

“한번은 이산가족 어르신께서 입원 중인 병원으로 촬영을 나갔어요. 이미 혼수상태라서 아드님이 대신 촬영을 했죠. 마지막에 아드님이 안타까운 마음에 ‘아버지, 북쪽 가족들에게 인사하셔야죠’라고 하자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어르신께서 번쩍 눈을 뜨시고 잠시 동안 카메라를 바라보시지 뭡니까.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펑펑 울었어요.”

가평=김철중 기자 tn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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