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바꾼 장면]정갈한 듯 우아한 석탑의 운율… 뭐지? 이 기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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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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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권 광주요 도자문화연구소 이사장

조상권 이사장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 처음 흙을 만졌지만, 미술계는 지금 그의 손끝에서 빚어진 도자기 하나하나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초년병”이라며 스스로를 낮춘다. 이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조상권 이사장은 예순이 넘은 나이에 처음 흙을 만졌지만, 미술계는 지금 그의 손끝에서 빚어진 도자기 하나하나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초년병”이라며 스스로를 낮춘다. 이천=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말로만 듣던 그 석탑이 눈앞에 있었다. 탑에서 뿜어져 나온 묘한 기운은 삽시간에 그를 휘감았다. 어른들이 왜 꼭 여길 가보라고 했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몇 번을 훑어 내렸다. 탑은 수줍은 듯 감춰뒀던 매력을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기둥과 벽면에 사용된 돌의 종류와 그 돌이 놓인 방향은 불규칙적이지만 일정한 운율을 가진 듯했다. 각 층 높이와 너비의 점진적 변화도 인상적이었다. 층마다 놓인 지붕돌은 또 어떤가. 끝이 살짝 들어올려져 하늘을 향한 것이 그렇게 경쾌할 수가 없었다. 하나에 감탄하면 다른 곳이 눈길을 잡았다. 정갈한 듯 우아했고, 투박함 속에 화려함이 빛났다. 단순한 모양새인데도 지루함이 없었다. 무려 1300년이나 된 건축물이라는 게 믿기질 않았다.

제 키의 예닐곱 배는 됨직한 탑을 앞에 두고 소년은 한참을 서 있었다. 마치 넋이 나간 아이처럼 미동도 않은 채 탑만 바라봤다. 1948년 어느 날, 충남 부여군 정림사지 5층 석탑(국보 9호) 앞에서 소년은 생각했다. ‘저런 걸 나도 만들어봤으면….’

어느덧 육십갑자가 한 바퀴 돌았고, 또 여러 해가 지났다. 열한 살 꼬마였던 조상권(77·광주요 도자문화연구소 이사장)은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백발노인이 됐다. 그는 지금도 매년 한두 번 부여를 찾는다. 그에겐 정림사지 석탑이 곧 ‘예술혼의 고향’과도 같기 때문이다. 북한공작원으로 떠돌던 30년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예술가로서의 삶을 찾게 된 것도 결국은 이 석탑 때문이라고 그는 믿는다.

어린 여행자

아버지 광호(廣湖) 조소수 선생(1912∼1988)은 재일교포 사업가였다. 6남매 중 맏이인 상권이 태어난 곳은 일본 도쿄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그는 가족과 함께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광복 후 처음으로 대한해협을 건넌 귀국선을 타고서였다.

부산에 있던 그의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내로라하는 정치가와 사업가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상권에겐 그들이 곧 넓은 세상과 만나는 창구였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가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질문공세를 펴는 그 아들에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곤 했다. 소년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건 한국의 유적지들이었다. 그런데 말로만 전해 들으니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당시엔 쉽게 사진을 구해볼 수 없었고, 변변한 책도 없었다. 궁금증이 점차 주체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5학년이 된 1948년 혼자 여행을 나섰다. 아버지는 출타가 잦았으니, 어머니만 설득하면 될 일이었다. 어머니는 처녀 때 혈혈단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던 ‘신여성’이었다. “세상을 보러 나가겠다”는 어린 아들의 선언에 아무런 토도 달지 않았다. 그가 설레는 마음을 안고 결정한 첫 목적지는 부여였고, 그 다음은 경북 경주시의 불국사였다.

광복 직후는 뭐든 열악하기 그지없는 시절이었다. 대중교통이란 것도 아주 드물었다. 만 11세 꼬마가 부산에서 부여까지 가는 길이 순탄할 리 없었다.

“세월이 오래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기차가 있으면 기차를 탔고, 버스가 있으면 버스를 탔죠. 이도 저도 없는 데선 무작정 걸었겠고. 허허허.”

그나마 부자 아빠를 둔 덕에 돈이 없어 차를 타고가야 할 거리를 부러 걸어가는 일은 없었다. 달리 말하면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었단 얘기다. 그 시절에 돈 걱정을 않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었다.

한번은 그런 일도 있었다. 부산에서 차표를 사려는데 주머니에 잘 넣어뒀던 돈이 몽땅 사라졌다. 말끔한 차림의 도련님이 혼자 있으니 누군가 소매치기를 한 게 분명했다. 그 자리에 앉아 엉엉 울었다. 주변에 있던 경비가 “왜 우냐, 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아버지 함자를 댔더니 돈을 찾아주기는커녕 “그 집 애냐? 그럼 울지 말고, 집에 돌아가서 돈 달라 해라. 그런 다음 다시 나오거라”고 핀잔을 주는 거였다. 당시 부산에선 조소수 선생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때부턴 여행경비를 주머니에 넣고 꼭 옷핀을 꽂았다.

부여와 경주

전쟁이 나기 직전까지 그는 전국 유적지를 맘껏 둘러봤다. 하지만 그의 뇌리 속에는 항상 부여의 정림사지 석탑과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국보 20호)이 있었다. 정림사 터에서 어린 상권이 ‘예술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다보탑은 그런 마음에 불을 질렀다. 지금 돌이켜보더라도 어린 시절의 ‘통찰력’에 가끔 놀랄 때가 있다.

“그때 처음 정림사지를 본 뒤에 불국사에 갔는데 ‘아, 다보탑이 정림사에서 왔구나’라는 생각을 떠올렸다니까요. 열한두 살 먹은 어린 애가 말이죠. 우리 문화를 관통하는 대표적인 미적 구조를 한눈에 알아챈 걸 보면 내가 생각해도 참 신기합니다.”

1950년 6·25전쟁으로 그의 삶은 다시 부산으로 좁혀졌다. 전쟁이 지루하게 이어지자 아버지는 “장남이라도 안전해야 한다”며 그를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아버지는 한국에서의 사업이 여의치 않자 홀로 일본에 건너가 있었다. 1952년 봄이었다. 그가 어린 시절 고국에 머문 시간은 고작 6년 반에 불과했다.

한국에 다시 발을 디딘 건 12년 뒤인 1964년 8월이었다. 이에 앞서 4월에 그는 세계 최고라 불리던 프랑스 파리의 국립 보자르 건축학교 본과(本科) 진학시험에서 1200명 중 수석을 했다. 프랑스 유학을 간 지 4년 만이었다. 이후 그의 이름에는 ‘전도유망한 건축학도’란 수식어가 꼭 따라다녔다. 그땐 아무도 두렵지 않았다. 그랬기에 누구에게도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한국 방문을 결심한 건 또다시 부여와 경주가 떠올라서였다. 본과에 들어가는 11월까지는 시간도 충분했다.

“3개월 일정으로 한국에 들어와서 당연히 부여와 경주부터 갔죠. 그러고는 다른 유명한 사찰들을 거의 다 돌아다녔습니다. 건축에 접목하려고 사진도 엄청 찍었어요. 우리 예술은 정말 깊은 맛이 있거든요.”

그는 그렇게 찍어간 한국 사찰과 건축물의 사진들을 늘 곁에 두었다. 하루는 그를 가르치던 교수가 책상 위 사진들을 유심히 보더니 “한국 건축에는 일본이나 중국에는 없는 ‘예술’이 있다”고 한마디를 건넸다. 그의 자신감은 배가 됐다. 어린 시절 정림사지 석탑에서 받았던 영감과 다보탑에서 확인한 ‘한국만의 구조적인 미(美)’에 대해서 더욱 확신을 갖게 됐다.

건축가로서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뭐든 해낼 자신이 있었다.

30년 만의 귀환

그는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다. 1967년 7월 8일,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이 일어났다.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공작단 사건 제1차 진상발표’를 위한 기자회견을 직접 열었다. 그날 신문에 공개된 혐의자 명단에는 ‘조상권(재불유학생회장)’이란 이름도 있었다.

그가 북한과 연결된 때는 본과 시험에 수석 합격한 후였다. 동베를린에 있던 북한대사관에서 ‘축전(祝電)’을 보내온 게 발단이 됐다. 당시 유럽 유학생들 사이에선 남한이든 북한이든 다 같은 ‘우리 민족’이라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그도 큰 고민 없이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의 초청에 응했고, 급기야 북한까지 다녀왔다.

중정의 조사를 눈치 챈 북한 대사관 측은 그에게 몸을 피하라고 연락했다. 그는 북한으로의 도피를 선택했다. 훗날 가슴으로 울며 후회했지만, 그땐 그게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다. 그러곤 꼭 30년을 북한의 공작원으로 살았다. 일본인으로 위장해 유럽을 오갔고, 지구 반대편의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같은 곳에서 남의 여권을 위조해 주는 따위의 활동을 했다. ‘세계적 건축가’가 되겠다던 꿈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삶이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때 이야기는 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 가슴 아픈 시절이 돼서요.”

그는 1997년 지금은 고인이 된 아내와 함께 귀순했다. 그러나 아들과 딸은 여전히 북에 남아 있다. 그가 귀순 동기 등에 대해 말을 아끼는 이유 중 하나다.

한국에 온 북한공작원은 1년 반 동안이나 외부와 단절된 채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1999년 자유의 몸이 됐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부여와 경주의 석탑을 보러 간 것이었다. 물론 35년 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1960년대를 생각하고 부여, 공주, 경주 여행을 3일 일정으로 짰지만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 덕에 하루에 세 곳을 다 돌아볼 수 있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보자르 건축학교를 1, 2년만 더 다녀 졸업했더라면…. 아쉬워하기엔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의 마음속엔 건축에 대한 열망이 여전하다. 그리고 그는 지금 도자기를 통해 그 열망을 승화하고 있다.

아버지는 그가 파리에서 유학 중이던 1963년 경기 이천시에 ‘광주요’를 만들었고, 막냇 동생 태권이는 그 사업을 크게 번창시켜 놓았다. 도자문화연구소의 이사장을 맡으면서 처음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으니 이제 도예 경력이 13, 14년차쯤 된다. 그런데도 그는 스스로 ‘초년생’이라 칭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저력을 믿는다. 어린 시절 정림사지 석탑과 다보탑을 보고 번득였던 예술적 직감은 나이가 들었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란다. 실제로 그는 예술계에서 뛰어난 도예가로 인정받고 있다. 해외에서 초청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건축물을 보면 맨 가장자리 기둥들이 조금 기울어져 있죠.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도자기에도 그런 라인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2년 만에 깨달았습니다. 건축과 도자기는 다르지 않아요. 그러니 지금 제가 빚는 도자기는 결국 저만의 건축물인 셈입니다.”

건축가 조상권은 설계도를 그리는 대신 새벽부터 물레를 돌린다. 그가 그토록 찬양하는 ‘한국적 미’를 온전히 담아낼 수만 있다면, 작은 도자기 하나는 수십 층 빌딩과 결코 무게가 다르지 않다.

▼ 1967년 ‘동백림 사건’ 이후 잃어버린 30년 ▼

■ 北서 고려청자 재현… 2점은 김일성에게 2점은 김정일 손에


조상권 광주요 도자문화연구소 이사장에게 1967∼1997년은 ‘잃어버린 30년’이나 마찬가지다. 촉망받던 건축학도에서 북한공작원으로 바뀌어버린 신분. 한껏 누리던 부와 명예는 차치하고라도 꿈을 잃었다는 것이 그에겐 가장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의 끝에서 선택한 ‘귀순’은 자식들과의 생이별이란 처절한 대가를 요구했다. 참 가혹한 삶이다. 그러니 그 30년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도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인터뷰 도중 조 이사장 스스로 꺼내놓은 기억이 하나 있다. 30년간 그가 남긴 유일한 흔적이라고 했다. 바로 고려청자를 재현한 일이었다.

1971년 북한의 간부들이 조 이사장을 찾아와 대뜸 물었다. “내년에 김일성 수령님께 드릴 선물이 뭡네까?” 이듬해가 김일성의 환갑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 기회에 북한이 아닌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때 떠오른 게 고려청자였다. 고려청자를 재현해 보겠다는 그의 아이디어는 곧 김일성에게서도 ‘OK’ 사인을 받았다.

그는 우선 청자를 만들어 본 사람을 찾아 달라고 했다. 최소한 청자 제작을 옆에서 본 사람이라도 필요하다고 했다. 사흘 만에 적임자가 나타났다. 평양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던 60세쯤 된 화부(火夫)였다. 화부는 그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전 사실 남쪽 출신입니다. 파리에서 유학하다 북한으로 오게 됐습니다.”

그제야 화부가 마음을 열었다. 자기도 남쪽 출신이라는 말과 함께. 그게 7월쯤이었다.

고려청자 재현에는 8개월쯤 걸렸다. 1972년 3월 그와 화부는 70cm 높이의 청자 12개를 구워냈다. 가장 잘 구워진 2개는 김일성에게, 그 다음 2개는 김정일에게 건네졌다.

그 무렵 아버지 조소수 선생은 1963년 설립한 광주요를 통해 한국 고유의 도자기 문화를 되살리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도자기에서만큼은 부자가 서로 통했던 셈이었다.

이천=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조상권#정림사지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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