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인터뷰]LG유플러스 이상철 부회장의 내 인생을 바꾼 장면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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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살던 이상철, 오산 미군부대 왔다가 한국장교 처우에 쇼크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어쨌든 한국으로의 출장이 발단이었다. 미국에 살면서 한국 땅을 자주 밟을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출장은 그의 회사가 미 국방부 프로젝트를 자주 진행했기에 가능했다. 오랜만의 고향나들이에 그는 기대가 컸다. 목적지는 경기 오산의 미군부대. 30대 초반의 소위 잘나가는 무선통신 전문가였던 그는 미군 대령 둘, 그리고 회사 사람들과 함께 오산을 찾았다.

그런데 오산에서 그의 뇌파를 강하게 자극한 건 통신시설이 아니었다. 바닥에 깔린 한국 장교의 매트리스였다. 미군은 사병도 따뜻한 막사에서 지내는데 한국의 공군장교들은 시멘트 바닥에 얇은 매트리스만 깔아놓고 잠을 청하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말이다. 입은 것도, 먹는 것도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좀 심하다 싶었다. 한국군과 함께 근무하는 미군에게도 화가 났다. 한국 정부를 향해선 더 큰 분노가 치밀었다. 동시에 오장육부 저 깊은 곳에서 살짝 고개를 들이미는 게 있었다. 애틋함이었다. 국력이 모자라 멸시받는 내 나라, 내 민족에 대한 연민이었다. 이상철(65·LG유플러스 대표이사 부회장·사진)은 그때 처음 생각했다. ‘이제 그만 돌아와야 하는 걸까?’ 1981년 말이었다.

귀국

“서정주의 시에서도 그랬죠.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봄부터 소쩍새도 울고, 먹구름 속에선 천둥번개도 쳐야 하는 거죠. 누님 생각도 나야 하고. 그때 제가 그랬습니다.”
▼ 귀국 후 군 통신설계에 혼 바쳐…옳다면 장관실도 쳐들어가 ▼

이상철 부회장을 만난 건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LG유플러스 사옥 24층 그의 집사무실에서여다. 그는 “인터뷰를 하기 전 공부를 좀 해써야 하는데 아침부터 웬 보고가 그리 많은지…”라며 웃었다. 그러고는 자유롭게 그의 인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이상철 부회장을 만난 건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LG유플러스 사옥 24층 그의 집사무실에서여다. 그는 “인터뷰를 하기 전 공부를 좀 해써야 하는데 아침부터 웬 보고가 그리 많은지…”라며 웃었다. 그러고는 자유롭게 그의 인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오산에서의 경험은 그를 내내 고민하게 했다. 힘든 유학시절을 보내고 이제 막 미국에서 안정을 찾아가던 무렵이었다. 그는 이미 통신업계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아내는 미국생활에 만족해했고 어린 남매는 또래들과 잘 어울렸다. 멋진 집도 한 채 장만해 남부러울 게 없었다. 미국 중산층의 안락함을 만끽하려던 찰나였다. 10년 전 유학을 떠나올 때의 일들도 머릿속을 스쳤다. 비행기에 오르는 그를 붙잡고 오열하던 친구, 뒤이어 마중 나온 친인척 50여 명이 일제히 울어버렸던 기억, 경유지였던 도쿄까지 3시간 내내 통곡하던 그를 다독이던 스튜어디스, 한국인 친구와 ‘모빌홈(캠핑카)’으로 이사가 처음 독립했던 날,…. 그런 아픔을 모두 견뎌내고 손에 쥔 안락함이었다. 미국과 한국 사이에서 그는 수십 번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그 무렵 한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었던 셋째 형(이상훈 전 국방부 장관·80)이었다. “거기서 아직 뭐하느냐? 얼른 한국으로 돌아와라. 여기서 할 일이 많다.” 그는 당시 미 국방부의 지휘통신 자동화체계를 설계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군 무선통신 분야에 기여할 부분이 분명 컸다. 귀국할 명분이 하나 더 생긴 셈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결정타’를 맞고 곧바로 짐을 쌌다. 세 살이던 딸이 갑자기 경기를 하는 바람에 급히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다. 다행히 구급차가 근처에 있어 아이는 위기를 넘겼다. 숨 가빴던 순간이 지나자 극심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내가 정말 어려워지면 여기선 누구에게 의지하지?’ 그는 스스로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결정했다. 갑작스러워하던 아내도 이내 찬성으로 마음을 돌렸다. 그러잖아도 처가에선 세 자매 중 맏딸인 아내에게 늘 들어오라고 노래를 부르던 참이었다. 귀국까진 3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1982년 5월 네 가족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눈물의 환송을 받으며 유학길에 오른 지 꼭 11년 만이었다.

당시엔 우연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뒤돌아보면 필연이었던 것 같다. 그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엔딩’을 만들기 위해 오산에 갔고, 형이 불렀고, 딸이 아팠던 건 아닐까.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치고, 누님이 보고싶었던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그의 귀국은 대한민국 무선통신을 한 걸음씩 앞으로 옮겨놓는 계기가 됐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이다.

통신

미국까지 건너가 석사·박사학위를 차례로 땄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대학교수가 되려고 했다. 실제 동부의 한 대학에서 제의도 왔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신문 한 귀퉁이에 난 구인광고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최첨단 위성을 만들기 위한 시스템개발회사를 만들었는데 기술인력을 찾는다는 것이었다. 면접을 보러간 그에게 대표가 사진 하나를 건넸다. 한 사람이 두 팔을 쭉 뻗은 채 축구공만 한 지구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본인들이 개발할 위성이 그만큼 높은 곳(3만6000km)에서 지구를 내려다볼 거라는 얘기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신나고 재미난 분야를 지나칠 뻔했다니. “아버지 호가 뭐였는지 아세요? ‘우보’였어요. ‘우주’ 할 때의 ‘우’에다 걸음 ‘보’자. 참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거죠. 하하하.”

그 회사에서 3년을 정말 신나게 일했다. 그는 NASA가 쏘아올린 인공위성에 실제 기여하기도 했다. 다음 직장은 워싱턴에 있던 시스템통합(SI) 업체였다. 거기서 3년째 일하던 무렵 오산 출장을 온 것이었다. 두 회사에서 보낸 6년간 그는 극초단파에서부터 초저주파까지를 두루 다뤘고 민간통신과 국방통신을 모두 경험했다. 무선통신에 대한 ‘내공’을 확실히 쌓았던 셈이다. 귀국과 함께 그는 국방과학연구소로 출근했다. 애초 한국군의 보잘것없는 처지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최첨단 통신기술로 무장한 그는 거침이 없었다. 모르면 가르쳤고, 비난하면 맞서 싸웠다. 삼촌뻘 별들에게 험한 말도 많이 했다.

“그건 잘 모르시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게 정말 군과 국가를 위한 말씀입니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할 정도의 혈기였다.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한 번은 그가 추진하던 차세대 군용 무전기 개발사업이 갑자기 중지됐다.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었다. 배경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바로 장관실을 찾아갔다. 직접 만든 ‘프로토타입’ 무전기로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장관도 몇 시간을 밖에서 버틴 그에게 백기를 들었다. “이 박사. 내 얘긴, 그러니까 빨리 개발하라는 말이야. 빨리.”

암초는 그 후에도 수시로 나타났다. 이상훈 장관이 부임하자 이번엔 엉뚱한 음해에 시달렸다. 장비 국산화의 명분이 있었음에도, 누군가는 장관의 동생이란 이유만으로 삐딱하게 바라봤다. 결국 이 장관은 특별감사를 지시하고 40명을 연구소에 내려보냈다. 조사는 두 달이나 이어졌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장비 테스트. 3일간 그의 한국형 무전기 시제품과 미국 장비의 정면승부가 펼쳐졌다. 도청 테스트는 무승부였다. 남은 건 전파 방해. 방해 전파의 출력이 커지자 미국 제품은 먹통이 돼 버렸다. 반면 한국의 무전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의 팀이 일궈낸 완벽한 승리였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날, 무전기 핵심 개발자 7, 8명은 빗속에서 서로를 얼싸안았다.

“그런 드라마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는 것마다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죠. 그래도 그때 우리가 개발했던 것들이 지금 군 통신체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자유인


초등학교 1, 2학년 때쯤이었다. 당시엔 종이든 나무든 손에 잡히기만 하면 깎고 다듬었다. 그날도 한참 뭔가를 만들다 보니 마루가 엉망이 돼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방에서 나오셨다. 크게 혼이 나겠구나. 그런데 어머닌 “마루가 좀 보기 흉해졌네” 하며 웃으시는 게 아닌가. 어린 상철은 혼자 조용히 풀을 가져와 파낸 나뭇조각을 붙이고, 하얗게 드러난 부분은 검은 펜으로 색칠을 했다. 물론 잘될 리 없었다. 원래대로 되돌려놓기는커녕 오히려 마루를 더 망가뜨리고 있는 막내를 어머니는 가만히 지켜보고 계셨다.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에서도 신부의 용서를 계기로 사람이 완전히 교화되지 않습니까. 어린 시절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제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듯해요. 엄격하고 무거운 교육을 받았다면 새로운 것만 쫓아다니는 지금의 제가 없었겠죠.”

그는 뭐든 새로 만드는 것에 평생 꽂혀 살았다. 그가 하던 프로젝트에는 항상 ‘차기’ ‘차세대’ ‘최첨단’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KT(당시 한국통신)에서도 통신망연구소와 무선사업본부를 처음 만들어 초대 소장과 초대 본부장을 지냈다. 그뿐인가. KTF 첫 사장, KT 첫 민영화, 통합법인 LG유플러스의 초대 대표이사 등 그의 직함에는 거의 ‘첫’ 또는 ‘초대’란 말이 붙는다. KTF 사장을 맡자마자 정한 사훈의 첫 번째가 ‘자유인’이었다.

2004년 한국장애인재활협회를 맡게 된 것도 ‘새로운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장애인 단체를 맡을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는 “정보기술(IT)이 장애인들에겐 새로운 창(窓)”이란 한마디에 협회장직을 수락했다. 그는 곧바로 장애인들에게 자유로운 생각, 도전의 정신을 심기 시작했다. 처음 만든 것도 ‘장애드림팀 6대륙에 도전하다’라는 장애인 해외연수 프로그램이었다. 첫해인 2005년 장애인 10명이 유럽으로 향했다. 그도 영국 런던 일정을 함께했다. 시각장애인 안승준 씨(32·한빛맹학교 수학교사)가 파트너였다. 그는 안 씨를 뮤지컬극장에 데려갔다. 대신 딸보다 어린 안 씨의 눈이 되어 줬다. 그는 공연 내내 무대. 배우, 조명, 관객의 움직임까지 세세히 설명했고 안 씨는 공연이 끝난 뒤 기립박수를 쳤다. 그런 경험들이 장애인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준다고 그는 믿는다.

신기한 건 어쩌다 보니 아내도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유산으로 남긴 정릉 땅을 토대로 2004년 3월 복지법인을 하나 만들었는데, 마침 아내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딴 것이었다. 그가 장애인재활협회를 맡은 지 6개월이 채 안 돼 아내는 복지법인 ‘우리누리’의 대표가 됐다. 방과후 교실로 시작한 법인은 지금은 70여 명의 아이를 돌보고 있다. 요즘엔 모래놀이를 통한 심리치료도 병행한다. 그는 여기에도 ‘필연론’을 적용했다.

“우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필연이었던 거죠.’

10년 전쯤이었다. 백양사의 서옹 스님을 뵌 자리에서 그가 물었다. “자유로움이 무엇입니까?” 그가 스스로 돌아보기에 그의 삶은 자유로웠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으로 인해 이뤄낸 것도 많지 않았는가.

아흔이 넘은 노(老) 스님이 답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그런데 자기 욕심을 버려야지.”

그 말씀을 그는 늘 곁에 둔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고 싶은 걸 신나게 하며 살 작정이다. 늘 그래왔듯, 그게 바로 이상철다운 거니까.
 
[채널A 영상] 군인 간식도 도너츠·커피…달라진 병영문화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이상철#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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