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안현진]‘낡아빠진’ 권투가 주는 감동 ‘라이츠 아웃’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3월 2일 14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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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츠 아웃\' 포스터. 2011년 1월11일 첫 방영됐다.
\'라이츠 아웃\' 포스터. 2011년 1월11일 첫 방영됐다.

날개가 꺾인 새를 보는 일은 슬프다. 픽션에서 (혹은 논픽션에서) 만나는 많은 캐릭터 중에서,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된 전직 운동선수들을 볼 때면, 나는 경험해보지 않은 막막함이면서도 괜히 울컥하곤 했는데, '운동선수'라고 스스로를 부르기까지 그들이 바쳤을 시간과, 흘렸을 피와 땀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 것이 슬퍼서였다.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일에도 인내와 이해가 필요하지만, 몸을 써서 목표를 성취하는 사람들 만큼 자신과 몸에 대해 인내하고 이해해야 하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이번에 소개하려는 TV시리즈 '라이츠 아웃'(Lights Out)은, 큰 부상을 당한 뒤 은퇴했던 전직 권투선수가 과거의 영광을 찾아 링 위에 돌아오는 이야기를 그린, 케이블채널 FX의 새로운 드라마다.

▶헤비웨이트 챔피언, 가족을 위해 링을 떠나다

'라이츠 아웃'의 파일럿 에피소드는 피멍이 들고 붓고 찢어진 얼굴로 선수 대기실의 철제 간이침대에 누워있는 헤비급 권투선수, 패트릭 "라이츠" 리어리 (홀트 매칼라니)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시작한다. 옆에서 울고 있던 의료보조원이자 라이츠의 부인 테레사(캐서린 매코맥)는 호흡을 가다듬고 각성제를 꺼내 기절한 남편의 숨결에 대고 터뜨린다. 그리고 암전.

라이츠는 리처드 "데스로우" 레이놀즈 (빌리 브라운)와 백중한 시합을 벌이던 도중 기억이 끊어졌는데, 일어나보니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다쳐 선수 대기실에 누워있었다. 그 자리에서 테레사는 남편에게 그만 두지 않으면 두 딸을 데리고 떠나겠다고 말하고, 라이츠는 다 이겼으나 데스로우에게 승리를 내준 시합을 마지막으로, 권투선수로서의 커리어를 마감한다. 그게 5년 전이다.

5년 뒤, 공식적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한 라이츠의 일상은 권투의 언저리를 맴돈다. 시합을 끝내고 은퇴하며 받은 자금을 가지고 코치인 아버지에게는 체육관을 선물했고, 역시 권투선수였으나 사고가 나 계속해서 선수생활을 할 수 없던 동생 조니(파블로 슈라이버)를 MBA 대학원 과정에 보내 체육관 경영과 라이츠 자신의 매니저 역할을 일임했다. 혼자 사는 누나 마고(엘리자베스 마블)를 위해 조그만 레스토랑도 내주었고, 무엇보다 의료보조원에서 의대에 진학한 테레사를 위해 아이들을 돌보고, 생활을 꾸려갔다. 그는 매일 아침 땀이 흥건하도록 달렸고, 딸들을 위해 아침을 차렸으며, 학교까지 매일 바래다주었다.

라이츠(왼쪽)와 부인 테레사. 라이츠의 복귀 결정은 단란한 가정을 불안정한 상황으로 이끈다.
라이츠(왼쪽)와 부인 테레사. 라이츠의 복귀 결정은 단란한 가정을 불안정한 상황으로 이끈다.

▶그러나 권투를 떠난 삶엔 만족하지 못하고…

가장으로서 라이츠가 수입은 대부분 체육관 밖에서 들어온다. 자선 파티의 빙고 게임장에서 번호를 불러주고, 카페트 판매업체에서 종이왕관과 붉은 새틴 가운을 걸치고는 "카페트가 필요하면, 카페트 킹을 찾아주세요!"라는 싸구려 광고를 찍고 수표를 받는다. "이게 바로 제가 그 유명했던 마지막 시합에 사용한 권투 글러브죠." 케이블 홈쇼핑 채널에 나가서 버블헤드(고개를 움직이는 작은 인형)와 함께 글러브를 경매에 내놓는 것도 링 위에 설 수 없는 라이츠가 돈을 버는 방법 중에 하나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기에, 몸의 안위와 라이츠의 자존감을 바꿨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새로운 돈벌이에 익숙해지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아니, 익숙해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권투를 떠난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

이런 라이츠에게 '컴백'의 아이디어를 안겨주는 것은, 그와 그 가족에게 닥친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이다. 조니가 경기장 밖에서 승부에 돈을 걸고,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권투라는 스포츠가 더 이상은 인기종목이 아닌 탓에, 체육관 경영이 전체적으로 어려워지면서 리어리 가족의 삶이 통째로 난국을 맞는다.

에바, 다니엘라, 케이트 모두 사립학교를 다니는 탓에 하루라도 학비가 늦으면 독촉전화가 오고, 자동차의 월납부가 늦어지자 대리점에서는 테레사의 차를 압류했다. 재정난은 좀 더 실질적인 고통으로 찾아온다. 조니가 도박업자에게 돈을 제때 갚지 못하자 힘 좀 쓴다는 깡패들이 조니를 찾아와 흠씬 두들겨 패고는 "빨리 갚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사라진다. 가족이라는 짐을 진 영웅, 라이츠는 그래서 무력으로 돈을 대신 받아다주고, 철장 안에 갇혀 손과 발로 생사를 다해 싸우는 도박 종합격투기 등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더러운 일'에 발을 담근다.

갑작스러운 경제적 어려움은 라이츠를 죽을 때까지 싸우는 '케이지 경기'로 내몬다.
갑작스러운 경제적 어려움은 라이츠를 죽을 때까지 싸우는 '케이지 경기'로 내몬다.

▶링 위, 그곳은 돌아가고 싶은 마음 속 고향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이츠를 조급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의 병이다. 아직 라이츠와 둘째 딸 다니엘라 말고는 모르는 사실인데, 5년 전 경기 중에 갑자기 정신을 잃은 것을 시작으로, 잦은 기억력 감퇴, 우울, 두통, 폭력적 증상까지, 그는 전형적인 '복싱선수 치매'를 앓고 있다.

어쩌면 링 위에 다시 오르려는 라이츠의 도전은 비단 돈 문제만은 아닐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오래 살 수 없다면, 마지막 만큼은 그가 가장 사랑했던 공간인 링 위에서 그의 가장 소중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모습으로, 그리고 가능하다면 패배의 오명을 씻으며 맞이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실 '라이츠 아웃'의 전개는 뻔한 구석이 있다.

'록키 발보아' '신데렐라맨' '알리'에서 링 위에 서지 못하게 된 선수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그 위에 다시 서기를 바라는지를 우리는 이미 목격한 바 있다. '라이츠 아웃'은 그렇게 복싱 링 위를 라이츠가 돌아가야 할 노스탤지아적 공간으로 만든다. 꿈꾸고 되새기며 기억하려고 애쓰는 그런 고향 말이다. 라이츠가 컴백을 결정한 것이 시즌1 에피소드 4편이 지나서이니, 쉬운 결심은 아니었다.

앞서 말한 더러운 일에 휘말려 경찰 조사도 받았고, 코치로 보람을 느끼려는 찰나에 선수로 뛰었던 오마르가 "나는 권투선수가 아니다"라는 선언과 함께 체육관을 그만두었다. 쉬운 결정이 아니었던 만큼 희생도 따른다. 테레사는 라이츠와 별거를 결정했고, 고등학교 동창인 스포츠 기자 마이크는 이런 저런 냄새를 맡고는 라이츠 주변을 맴돌며 탐문한다. 그래도 시청자는 알고 있다. 라이츠가 모든 역경을 딛고 링 위에 올라설 것을. 그리고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을 말이다.

시즌1 에피소드6에서 라이츠는 링 위로의 컴백을 공식화한다.
시즌1 에피소드6에서 라이츠는 링 위로의 컴백을 공식화한다.

▶고상하고 고결한 권투라는 스포츠를 통해서

권투라는 스포츠를 떠올리면 이미지는, 개인적으로는 낡음이다. 보호기구라고는 마우스피스 하나 물고 나가 펀치를 견뎌내야 하는 아이디어도 현대적이라고 하기 어렵지만, 권투선수를 육성하는 체육관의 낡음은 오래되어 낡았다기 보다는 오래되어 낙후한 이미지다. 샌드백은 곳곳이 찢어져있고, 철제 캐비닛은 녹이 슬어 벌겋다. 한때 권투는 "스포츠의 제왕"이었다고 하나, 이제는 꼭 그 철제 캐비닛처럼 벌겋게 녹이 슬었고, 샌드백처럼 낡아서 헤진 느낌이다.

그런데 그래서인지 이 스포츠의 승리는 유난히도 감동적이다. 온몸으로 고통을 견디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 최후의 일격을 날리면 상대는 쓰러지고, 주인공도 겨우 몸을 가눈다. 얼굴은 멍투성이고, 머리 속은 멍할 것이다. 이 몸을 바쳐 얻는 승리의 귀중함, 규칙을 따르는 고상함이 오늘날의 격투기 종목과 다르게 감동을 준다면 과장된 해석일까? 나는 단 한번도 권투라는 스포츠의 팬은 아니었지만, '라이츠 아웃'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권투의 면면은,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불리기에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장수여부와 관련 없이, 라이츠의 컴백 스토리가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를 바라본다. 아마, 권투 팬이 아닌 나를 설득했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어느 정도 합격인지도 모른다.

P.S. 안녕, 이제는 안녕.

컴백을 소재로 하는 TV시리즈를 소개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미드타운 칼럼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잡지사를 나와 유학 온 뒤 처음 고정으로 쓰게 된 칼럼이었고, 소중한 인연으로 시작한 만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이 칼럼의 수명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늘 마지막엔 처음을 돌아보게 된다. 처음 이 코너를 맡게 되었을 때는 "개편 전까지만 하면 선방"이라고 생각했는데, 2주 간격으로 이번까지 모두 31회를 마감했으니 1년 이상 쓴 셈이다. 마침 2011년은 내가 31살이 되는 해다. 여러 가지에 의미부여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딱 좋은 순간에 작별을 고한다고 생각하련다. O₂에서 준비하는 새로운 미국드라마 코너가 생긴다면, 가장 열심히 읽는 독자가 될 것을 약속하면서, 이젠 안녕.

안현진 잡식성 미드 마니아 / joey042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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