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손택균의 카덴차>“류승완 감독? 데뷔작이 대표작인 사람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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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28일 17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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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동아일보 2010년 10월 26일자 A27면에 게재한 영화 '부당거래' 프리뷰 기사에 반영된 류승완 감독(37)과의 인터뷰 전문(全文)입니다. 류 감독과는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나 1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대화 중 영화의 중요한 내용을 밝힌 스포일러가 몇 군데 포함됐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부당거래’로 “데뷔 10년 만에 처녀작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류승완 감독. 사회 권력을 비판하는 내용에 대해 그는 “시나리오를 쓴 원작자의 속내는 모르겠지만, 나는 분화된 개인의 사연에 집중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훈구기자 ufo@donga.com
‘부당거래’로 “데뷔 10년 만에 처녀작을 뛰어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류승완 감독. 사회 권력을 비판하는 내용에 대해 그는 “시나리오를 쓴 원작자의 속내는 모르겠지만, 나는 분화된 개인의 사연에 집중하려 했다”고 말했다. 이훈구기자 ufo@donga.com

류 감독의 영화는 대학 시절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비디오로 본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인상 깊은 장면에 대한 기억을 그 배경이 됐던 공간의 이미지와 감촉을 매개로 해서 많이 붙드는 편입니다. '죽거나…' 테이프를 플레이어에서 꺼내던 순간의 멍했던 기분이 아직 생생합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작품 행보는 별반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대작전', '주먹이 운다', '짝패' 등은 소재와 캐릭터 설정이 흥미롭고 화법이 경쾌했지만 오래 기억할만한 의미 있는 수작이라고 보기에는 만듦새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바로 전작인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년)에서 보여준 안이한 자기복제와 자아도취는 솔직히 불쾌했습니다.

마침 인터뷰 이틀 전 사석에서 만난 두 사람이 이구동성 저와 비슷한 의견을 들려줬습니다. "류승완 감독? 데뷔작이 대표작인 사람이잖아…?"

제 답변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괄목상대할 만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이날 저녁의 대화를 전제로 삼아 질문을 엮었습니다. 류승완의 무엇이, 어떻게, 왜 달라진 것일까.

'부당거래'를 검찰, 경찰, 범죄자, 언론이 뒤얽힌 먹이사슬 속 아귀다툼에 대한 사회비판 이야기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하지만 표면적인 요소만으로 그렇게 바라볼 때 이 영화는 그리 흥미롭지도 새롭지도 않습니다. '공공의 적'에게 던지는 영화의 꾸짖음이 아무리 준엄해도 결국 뒷맛은 공허할 뿐이라는 것을, 관객은 알고 있습니다.

류 감독의 7번째 장편인 이번 작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영화 중반 형사 최철기(황정민)가 밤늦게 여동생에게 불쑥 찾아가 밥을 얻어먹는 부분이었습니다. 기자, 검사, 의사, 형사를 다룬 여타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마다 불쑥불쑥 느껴지던 이물감이 이 영화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 어색함 없는 자연스러운 현장감만으로도, 충분히 높은 가치를 매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제공 영화인
사진 제공 영화인

-검찰, 경찰, 언론 등 기성 조직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담겨 있다. 영화의 중심 이야기를 그것으로 보면 될까.
"박훈정 감독이 쓴 시나리오에는 분명 비판적 뉘앙스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회나 조직보다는 해당 직업을 가진 어떤 사람, 즉 '개인'에 포커스를 뒀다. 개인이 조직과의 관계에서 얽히고설키며 만들어나가는 갈등 상황은 검찰, 경찰, 언론이 아니라도 어디서나 벌어진다. 관객의 판단을 존중해야겠지만, 나에게 사회비판의 의도가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내가 관객으로서 좋아하는 영화 역시 정치적인 메시지를 선언적으로 던지는 영화보다는 개인사에 집중하며 배경에서 그런 분위기를 은근히 우려내는 것들이다. '살인의 추억' '추격자' '의형제'를 보면 독특한 개개인의 캐릭터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배경이 되는 시대상황을 짐작하게 만든다. 그런 방식의 영화들이 갈수록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현장에 대한 디테일한 취재의 노력이 많이 보인다.

"만드는 사람의 상상력에 의존하기보다는 등장인물과 같은 직업을 가진 실제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제대로 될 때 가치가 생길 영화라고 판단했다. 사실 판타지에 가까운 '아라한 장풍대작전'을 만들 때도 취재는 많이 했다. 상상력이 풍부하거나 두뇌가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을 발로 때워야 한다. 내가 직접 취재도 하지만 연출부들이 늘 고생을 많이 한다. 나는 솔직히 경찰이나 검찰의 조직 체계를 아직도 잘 모른다. 만들면서 경찰담당 검찰담당 연출부에게 일일이 확인하는 거다. '야 이거 맞니? 나중에 확인해 보고 틀리면 죽어' 하는 식으로. 하하. 취재 대상을 만나거나 공간을 확인할 때 혼자 가지 않고 꼭 배우나 연출부, 제작부 사람과 동행한다. 아는 만큼만 보이기 때문이다. 설명을 들어도 사실 그대로를 섭취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잘못 해석될 가능성이 늘 크다고 본다. 영화는 공동작업이다. 여럿이서 같은 것을 보고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의논하는 과정에서 좋은 결과가 나온다. 이번에는 특히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검찰, 경찰, 언론 관계 지인들의 조언과 도움을 많이 받았다. 언젠가부터 '내가 편안한 사람들, 영화를 만드는 동료들만 만나고 있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됐다. 세상 이야기를 담는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이면서, 다양한 삶의 경험을 들려줄 수 있는 사람들을 부지런히 만나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었던 거다. 20대 때 '거리에서' 살았던 경험을 재산으로 삼아서 지금까지 버텨 온 건데, 이제 그건 이자까지 다 받아먹고 바닥이 난 것 같다. 사회부 기자들, 사업하는 분들 등 영화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이야기를 되도록 많이 만나서 들으려 애쓰고 있다. 노력만큼 성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데뷔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류승완 감독의 베스트였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적잖다. 그런데 이번에 그걸 뛰어넘은 것 같다는 평가가 들린다.

"그냥 그런가보다 싶다.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봐서 별 감흥이 없다. 물론 기분은 좋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유명함'과 '유능함'의 차이를 절실히 느낀다. 이번에 포스터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내 이름을 작게 박아달라고 했다. 황정민 류승범 유해진의 영화로만 보이면 좋겠다 싶었다. 내 영화라고 하면 일단 무조건 '배우들이 돌려차기 많이 할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내가 저질러놓은 영화들이 그랬으니 누구 탓도 할 수 없다. 하하. 그런데 '류승완이 처음으로 액션을 자제하고 드라마로 승부했다'는 식의 얘기에는 의구심이 든다. '주먹이 운다'가 그렇게 액션이 많았나? 나는 나름 매번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시도해 왔다. 오해가 좀 있다고 본다."

-본인이 '정말 잘 하는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액션'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박찬욱 감독이 언젠가 '네가 잘 하는 건 액션이 아니다'라는 얘기를 했다. 내가 정말 잘 하는 것을 볼 수 있으려면 시간이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다만 전에는 내가 좋아했던 장르 영화의 이미지에서 얻은 쾌감을 하나의 영화로 확장하려고 했다면, 요즘은 갈수록 캐릭터 간의 관계와 이야기의 본질에 더 집중하게 된다. 이전 방식으로는 할만한 걸 다 해 본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평가와 무관하게 전에 만든 영화들의 가치도 분명 있다고 본다. 관객이 좋아해줬던 것도 '죽거나…'에서 형제, 친구 사이의 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영화라는 게 결국 '이야기와 인물'이구나. 그런 생각 많이 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장르를 해 볼 생각은 없나. 뮤지컬이나 사극 같은.

"사극은 한번 진행하다가 중단한 적이 있다. 정말 힘들더라. 찍을 장소도 별로 없고. 나는 현재의 이야기가 좋다. 물론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는 방법도 있지만 평소 과거나 미래의 일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도 아니고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다음 작품 계획은.

"준비하는 게 있지만 아직 밝힐 단계가 아니다. 그리고 갈수록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다. '부당거래'도 원래 내가 하려던 게 아니다. 어떤 걸 하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꼭 그대로 되는 건 아닌 듯하다. 그게 꼭 나쁘다는 건 아니다. 데뷔작에서는 '사람 사는 게 의지대로만 되는 게 아니다'라는 얘기를 했다. 그런데 다들 불가능하다 했던 영화를 20대 때 만들어 좋은 평가를 들으니 '나는 의지대로 할 수 있다'는 기분에 젖었다. '다찌마와 리…'가 흥행에 실패하고 나서 정말 많이 힘들었다. 머리로 안 게 아니라 몸으로 느꼈다. 삶이 사람 맘대로 만은 안 되는구나 싶더라.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맞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사진 제공 영화인
사진 제공 영화인

-영화 중반에 류승범(검사 주양 역)이 황정민에게 "남들이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만 올려놓은 거"라며 농담을 던지는 장면이 있다. 2005년 대종상 시상식 때 황정민이 남우주연상 수상 소감으로 해서 화제가 됐던 말이다. 관객들이 많이 웃던데. 애드리브인가.

"아니다. 황 선배 출연이 결정되고 나서 내가 시나리오에 넣었다. 내가 워낙 그런 장난을 좋아하는데…. 배우들은 되게 싫어했다. 황정민 선배는 '싫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본 리딩 할 때나 촬영할 때 늘 그 대사에 대해 굉장히 차갑게 리액션을 했다. 승범이도 '아 이거 뭐야' 하면서 짜증을 내더라. 문맥에서 벗어나는데 유머만을 위한 억지라면 안 했겠지만 관객에게는 용서가 될 거라고 판단해서 일단 찍었다. 촬영 때 반응이 하도 그래서 '아 이거 편집할 때 빼야 하나' 했는데 모니터 하면서 반응 보고 집어넣었다."

-황정민 씨가 냉담하게 반응해서 더 재미있었다.

"하하. 정말 기분이 안 좋았던 건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반응이 좋으니까 이제 한 번 물어봐야겠다."

-개봉 시기와 겹쳐서 기업 비리 수사 뉴스가 터졌다.

"대본 받았을 때만 해도 아동성범죄 정도만이 기시감을 일으키는 사건이었다. 심지어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거 말이 되냐' 하는 의견도 많이 나왔다. 그런데 촬영 중에 비슷한 사건이 일파만파 터지니까 만화 '데스 노트' 생각이 나더라. 승범이는 '형 이거 자꾸 다큐멘터리가 돼 가는 것 같아' 하더라. 황정민 선배는 촬영 전에 리딩 하고 같이 밥 먹다가 '근데 이거 개봉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촬영 중반에 '이 영화 프리미어 시사를 베니스나 토론토 영화제에서 먼저 하고 들어와야 하지 않을까'에 대해 진지한 검토가 있었다. 우려가 컸다. 마치 발 빠르게 사회 현안에 대처해서 만든, 그럴듯한 기획영화처럼 보일까봐서. 근사한 사회비판을 하는 듯한 팬시 영화처럼 보일까 걱정이 됐다."

-걱정했던 '태클'이 있었나.

"전혀. 투자 받는 데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것도 영화의 내용 때문은 아니었다. 이 영화는 '유사 가장(家長)'에 대한 이야기다. 조직 생활을 하면서 자기 사람들을 책임지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 속에서의 비애에 대한 표현에 공감을 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소재는 공분(公憤)해야 하는 것이지만 '공감을 얻어야 할 영화'라고 와이프가 말해줬다."

사진 제공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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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가족'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왔다.

"검찰이나 경찰들이 서로를 '식구' 또는 '가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가장'이 식구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사람이 살다 보면 가장 큰 상처를 누구에게 받나. 가족이다. 오사마 빈 라덴이나 김정일한테서 받는 상처보다 자기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내미에게 받는 상처가 훨씬 크다. 주변에서 '김정일이 자기 아들에게 권력 세습해줘서 정말 못 살겠다'고 하는 사람 봤나. '우리 식구 땜에 괴로워서 못 살겠다'고 하지. 개인에게 '세상이 무너진다'는 건 가족과 관련된 일 아닐까. 다들 G20 정상회담 같은 거대한 얘기를 많이 하지만, 나는 개인이 무너진 세상이라면 그런 건 다 소용없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영화 만들기 시작할 때 주인공 철기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만드는 과정에서 갈수록 철기가 안쓰러워지더라. 나도 결혼하고 자식 낳아서 기르고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황정민 선배하고도 그런 얘기 많이 했다. '우리는 철기처럼 살지 말자. 하고 싶은 얘기 가족한테 털어놓자'고. 결말에서 철기가 하고 싶은 말은 아마 그런 거였을 거다. '야, 나 혼자 잘 되려고 그런 짓 한 거 아니야 나. 다 같이 잘 돼 보자고 한 거였어, 이 자식들아….' 하지만 철기는 결말에서 그런 말을 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나는 우리 사회 가장들에게 그런 모습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장남, 가장은 무의식중에 일단 참으라는 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그러다보면 정말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지 헷갈리게 되지 않나. 그런데 어느 순간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 게 멈출 수 없는 본능처럼 돼 버리고 있는 게 아닐까."

-영화 속 대사에 '진담'은 하나도 없다. 거의 다 '구라'다

"가면 쓰고, 간 보고, 빙빙 둘러서 얘기한다. 비유를 많이 썼다. 저자거리 속담들. 애초의 의도는 아니었다. 원래 받은 대본은 이야기 진행에 필요한 대화만 건조하게 쓰여 있었다. 무협영화 보면 내일 해가 뜨자마자 당장 목숨 걸고 칼부림할 사람들이 점잖게 마주 앉아서 장기를 두면서 술잔을 주고받지 않나. 그런 뉘앙스를 현대적으로 재현하고 싶었다. 제작자인 한재덕 PD가 조기축구 회원들에게 들은 표현을 들려줄 때 그걸 열심히 메모해서 써먹었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야 한다'는 둥…. 하하. 영화에서 형사들이 경찰서를 '회사'라고 부르는 것, 검사들이 '좋은 사건'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모두 현장 사람들 얘기에서 취재한 거다. 그런 잔재미가 많았다. 얘기가 좀 벗어났나. 속내에 다른 칼을 갈고 있으면서 들키지 않으려고 빙빙 돌려 가는 건…. 형사들과 얘기하다가 '우리 업무는 조사로 끝장내는 거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얼르고 달랜다'는 표현이 정말 맞더라. 자기 속을 다 내보이는 것처럼 해서 상대방으로부터 원하는 말을 끄집어내려고 하는 순간에도 어쩌면 그 '속내'는 진짜 속내가 아닌 거다. 목적이 있는 진심. 전문가로서 살아가려 하는 버릇이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이 직업에 의해 후천적으로 얻는 기질의 첫 번째는 자기 발톱을 숨기는 것 아닐까.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 진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 영화가 전반적으로 '결국 센 놈이 이기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 인 것 같기도 하고.

"다시 박찬욱 감독 얘기를 하면…. 요정에서 철기가 주양 앞에서 벌거벗고 무릎 꿇는 장면. 그 때가 어쩌면 유일하게 그의 진짜 진심이 날것으로 드러난 순간이다. 조금 더 강한 사람이라면 다른 방식을 선택했겠지. 그 때 주양은 '머리 좋아서 검사 한 사람이 이런다고 당신 잘못을 쉽게 잊어버리겠어?'라고 말한다. 박 감독은 그 말이 정말 무서웠다고 했다. 야 이게 정말 안 되는구나, 하고. 나는 권력의 최상층에는 시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한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 않나. 이 영화에는 현실의 문제를 보여줄 뿐 제시하는 해법이나 입장 같은 게 없다. 내게 그럴만한 깜냥이 없는데다 영화의 역할이 그런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건 개인적인 얘기인데…. 나는 우리 사회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고 믿는다. 외국에 가보면 부러운 게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정말 관심 있는 걸 열심히 배울 수 있는 여건이 돼 있는 거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국에서는 영어회화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정말 대화를 나누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질문을 위한 질문일지 몰라도 이런 고민이 좀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

감독으로서뿐 아니라 여러 작품에 배우로도 얼굴을 내밀어 온 류승완 감독은 “데뷔작 때야 배우를 구할 수 없어서 내가 나섰지만 경험이 쌓일수록 ‘나 같은 배우’와 일하고 싶지 않아진다”며 “당분간 내가 연출하는 영화에 출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훈구기자 ufo@donga.com
감독으로서뿐 아니라 여러 작품에 배우로도 얼굴을 내밀어 온 류승완 감독은 “데뷔작 때야 배우를 구할 수 없어서 내가 나섰지만 경험이 쌓일수록 ‘나 같은 배우’와 일하고 싶지 않아진다”며 “당분간 내가 연출하는 영화에 출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훈구기자 ufo@donga.com

-영화 얘기로 돌아가자. 이번 영화에는 왜 본인 출연은 안 했나.

"나는 내 연기가 마음에 안 든다. '짝패' 하고 나서 욕심이 없어졌다. 더 좋은 배우와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단하는 것 같고. 길게 나왔던 건 내 영화에서 액션 때문에 했던 건데 '짝패' 찍으면서 무릎 크게 다쳐서 이제 액션도 예전만큼은 안 된다. 오늘처럼 갑자기 추워지거나 비가 오면 무릎이 아프다. 그것 때문에 운동을 예전만큼 못 하니까 어렸을 때 다쳤던 다른 부위나 허리도 더 아프다. 내가 연출하는 영화에서 연기할 생각은 이제 별로 없다. 얼마 전에 '평양성' 한 신 찍은 거는 교환 우정출연이다. 이준익 감독님이 '부당거래'에 잠깐 나오지 않나. '평양성' 출연료로 백화점 상품권을 받았는데 열어보니까 우리가 드렸던 거더라. 하하. 사람 일은 모르니까 뭐 혹시 앞으로 정말 만들고 싶은 영화 대본을 썼는데 캐스팅이 아무도 안 되면 나라도 해야겠지. 그런데 좋은 배우들하고 많이 일하다보면 나 같은 배우하고는 일하기 싫어진다. 이번에 두 장면 대사 한 마디 없이 나온 안길강 선배 같은 경우. 광역수사대 팀장으로 나오는데 사무실에서 철기 노려보는 짤막한 장면. 짧지만 보는 사람을 한방에 압도하는 밀도가 있어야 한다. 다행히 연락드리면 '에이, 고기 한 번 사라' 하고 도와준다. 하하."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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