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81>

  • 입력 2009년 9월 15일 15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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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섬에서 SAIST까지 가는 동안, 민선은 줄곧 잠을 잤다. 지난 밤, 뜬눈으로 지새운 것이 사실인 듯했다. 석범도 피곤해서 자동모드를 이용했다. 중간에 두 번 스마트폰에 불이 들어왔지만 받지 않았다.

SAIST 도착 10분 전에 민선이 몸을 뒤척이다가 잠에서 깼다. 석범은 안경을 내밀며 물었다.

"아직 9분 47초 남았어. 조금 더 눈을 붙여도 돼."

"날 재워놓고 또 어디로 사라지려고요?"

민선이 머리끈으로 뒷머리를 돌려 묶었다.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엔 곁에 있을게. 약속해."

길이 왼편으로 꺾였다. 민선은 안경을 고쳐 쓰고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날 좋아한 여잔 남 앨리스였어."

석범이 덧붙였다. 그들은 달섬에서 서사라와 최 볼테르 이야기만 했다. 관악산에서 사망한 또 한 사람 남 앨리스에 대해서는 석범과 민선도 말을 아꼈다.

"그랬어요? …… 역시 그랬군요."

"역시 그랬군요 라니?"

"느낄 수 있었어요. 날 무척 싫어하더군요. 매사에 톡톡 쏘고. 워낙 선머슴 같은 성격이라서 그런가 하고 넘겼는데, 사심이 있었네요."

"남형산 누구에게나 그래."

짧은 침묵이 흘렀다. 민선이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례식은……?"

"보안청이 예식을 주관하게 될 게야. 보안청 지하에서 조문객도 받을 예정이고……."

민선이 운전대를 잡은 석범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곁에 있어 줄 게요,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석범이 쓸쓸하고 짧게 웃어보였다.

"대뇌수사팀은 어떻게 되나요? 팀장 혼자밖에 남지 않았네요."

석범이 말머리를 돌렸다.

"최 볼테르 교수는 스티머스를 알고 있었을까?"

"네?"

민선이 갑작스런 질문에 답을 못한 채 반문했다.

"최 교수는 글라슈트에 얹을 뇌가 필요했던 것 아냐? 그래서 여러 명을 죽였는데, 하필 그게 스티머스를 이용한 대뇌수사팀의 수사 방식을 무력화시키는 꼴이 된 게지. 최 교수가 범인이라면, 헌데 그가 스티머스의 존재를 몰랐다면, 대뇌수사팀은 새 팀원을 뽑아서 계속 꾸려나가야겠지. 스티머스로 해결 가능한 사건은 아직 많으니까."

"그, 그렇겠군요."

"하지만 최 교수가 스티머스를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있었다면, 그럼 기밀이 이미 샌 것이니까 대뇌수사팀을 유지하는 것도 무의미해져. 안타깝지만 팀을 해체하고 나도 다른 부서를 알아봐야겠지."

"설마…… 날 의심하는 건 아니죠? 내가 최 교수에게 스티머스와 대뇌수사팀을 알려줬다고 보는 건가요?"

민선의 목소리가 떨렸다. 석범이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호오,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는데,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 당신은 대뇌수사팀 자문위원이었으니, 최 교수랑 짰다면……."

자동차가 SAIST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석범은 거기서 이야기를 멈췄다. 차세대로봇연구소 뒤뜰에 차를 세우고 훈련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민선이 석범을 막아섰다.

"왜?"

"이야기를 계속 해야죠?"

"무슨 얘기?"

석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지금 날 의심하고 있잖아요? 내가 최 교수랑 짰을 지도 모른다고."

"내가 노민선 당신을 의심한다고? 두 사람이 짰다면 일이 훨씬 쉬웠을 거라고 말한 건 당신 아니었나?"

"짠 게 아니라 내가 알려줬다고 의심하냐고 물었어요."

"짠 거나 알려준 거나!"

석범이 민선을 지나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민선이 따라붙기 위해 종종걸음을 쳤다. 석범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획 돌아섰다. 하마터면 민선의 콧잔등에 이마를 찧을 뻔했다. 석범의 노려보는 눈길을 슬쩍슬쩍 훔쳐보며 민선이 물었다.

"왜요?"

"당신이 최 교수의 공범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당신이 대뇌수사팀 자문위원으로 온 건 도그맘 여사가 살해된 직후니까. 도그맘 여사까지 최 볼테르 교수가 죽였다면, 당신이 스티머스를 알기 전에 벌써 살인은 시작된 거니까. 어때, 내 추리에 틀린 부분이라도 있나?"

민선이 즉답을 못한 채 얼굴만 붉혔다.

석범이 다시 돌아서서 훈련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민선은 잠시 머리를 매만지고 안경을 고쳐 쓴 후 영혼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오후 5시가 가까웠지만 여전히 햇살이 따가운 초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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