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정세균은 기회주의자인가

  • 입력 2009년 8월 30일 20시 03분


“과거 차별화라는 이름으로 기회주의 정치를 한 적이 있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이하 정세균)가 지난주 서울 여의도 당사 회의실에 김대중(DJ)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을 나란히 걸면서 이렇게 말했다. “두 대통령을 나란히 모심으로써 기회주의 정치를 청산하는 것으로 이해해 달라”며 한 말이지만, 마음이란 이상한 생물이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순간부터 코끼리만 생각난다. 합리적으로 알려진 정세균이 실은 기회주의자인지 궁금증이 솟았다.

중도개혁-낡은 진보 오락가락

작년 9월 여의도 당사로 옮긴 뒤 “두 전 대통령 사진을 거는 문제를 논의해 달라”고 꺼낸 사람이 정세균이었다고 당시 신문은 전한다. 중도개혁주의 노선을 채택한 대의원회의에서 새 대표로 선출된 지 두 달째.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며 “뉴민주당 플랜으로 정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던 때였다. 새 정치를 다짐했는데 ‘잃어버린 10년’의 정체성으로 갈 순 없었던지 여태 두 사진은 걸리지 못했다.

정세균의 야심 찬 프로젝트였던 뉴민주당 플랜은 성장 강조, 이념 제외가 핵심이다. ‘진보’라는 용어에 염증을 낸 옛 민주당계 의견대로 ‘새로운 진보’라는 말도 빠졌다. 5월 17일 발표된 플랜의 초안은 그러나 23일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하면서 쑥 들어갔다. 추모열기가 뜨겁자 정세균은 ‘노무현정신’ 계승을 선언했다. 석 달 뒤 DJ가 세상을 떠나자 이젠 DJ정신까지 승계하겠다는 거다.

그러고 보면 정세균은 DJ의 민주당을 깬 사람에도, 열린우리당을 만들고 또 그 당을 깬 사람에도 들어 있다. 1995년 DJ가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현 민주당)에서 정치를 시작했지만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과 함께 DJ를 떠났다. 2007년 열린우리당 의장 때는 대선 승산이 없어지자 의원들을 기획탈당시키는 방법으로 스스로 민주신당에 흡수 합당됐다.

다시 민주당에서 정세균은 대표 경선 때부터 친노(親盧)와 386을 옆에 두고 있다. 옛 민주당 사람들이 비주류로 밀려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어제도 정세균은 “친노세력이 통합의 우선순위”라고 밝혔다. 옛 민주당에서 가장 좌파, 뉴민주당 플랜에선 버리자고 했던 ‘낡은 진보’ 노(盧)정신 추종자들이 입당할지도 의문이지만, 여기에 촛불세대 광장세대까지 합칠 경우 DJ정신이 남아날지 의심스럽다.

정치가 생물이라면 정치인들의 오락가락은 기회주의 아닌 ‘진화’일 수 있다. 차기 대권주자의 꿈이 없지 않을 정세균으로선 강한 이미지가 절실했을 터다. ‘미스터 스마일’한테 개혁적 카리스마가 보인다는 평가가 나온 것도 작년 말 국회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면서부터다. 지난주엔 무조건 등원을 결정한 민주당 지도부워크숍에서 정세균만 장외투쟁을 고집했다고 한다.

뉴민주, 멋진 야당에 희망 있다

그는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강행에 저항하기 위해서라지만 거짓말 아니면 건망증이다. 2005년 말 사립학교법 직권상정과 날치기통과를 주도해 정국을 극단으로 몰아갔던 사람이 당시 열린우리당 당의장 겸 원내대표 정세균이었다. 그때는 “야당이 OK할 때까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면 야당에 의한 변형된 독재”라더니 이번엔 “직권상정은 국회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이란다. 대통령도 중도실용을 선언한 마당에 국회 밖에서 강경투쟁을 또 한다는 건 대기업 간부와 장관까지 지낸 신사답지 못하다.

사학법은 그 후 재개정을 했는데도 지금껏 고통 받는 사학이 많을 만큼 국민의 자유와 발전을 제약하고 있다. 구석구석 그런 고통을 주었기에 정세균도 열린우리당 간판을 떼면서 “민생문제가 세계적인 현상이라지만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노 정부 때가 세계적인 호황이었던 걸 ‘경제통’이 모를 리 없다. 그것도 기회주의적 발언이었는지 묻고 싶다.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개인의 적응은 적극 장려할 일이다. 문제는 제1야당 대표의 부단한 진화가 우리나라에 좋고, 세계적 흐름에도 맞는 적응이 아니라는 데 있다. 6월 유럽연합(EU) 의회선거에서 좌파정당의 몰락을 보면 알 수 있듯, 시장경제와 세계화를 인정하지 않고 반대만 일삼는 낡은 진보는 설 자리가 없다.

지난달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우파가 좌파적 정책을 취해 국민의 마음을 사는 바람에, 투쟁과 폭력에 매달려온 좌파는 세계 어디서고 표를 잃고 있다”고 했다. 일본 민주당도 좌파 색깔을 빼 유권자를 안심시키고서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1년 전 ‘9월 위기설’이 돌았을 때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잘랐던 정세균을 나는 기억한다. “과거 같으면 각 정파가 유리하게 활용했겠지만 민주당은 정략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말도 감동적이었다. 이번만큼은 기회주의라도 좋다. 뉴민주당 플랜에 나온 일자리중심 성장과 기회의 복지정책으로, 국회 안에서 대안을 논하는 멋진 야당으로 돌아가야 국민도 2012년에 희망을 걸 수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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