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왜구대책 중 엉뚱한 儒-佛 논쟁… 임진왜란 자초

  • 입력 2009년 5월 23일 02시 59분


명종 10년(1555년) 5월 11일, 전남 영암 달량에 왜선 11척이 나타났다. 300∼400명의 병력이 해안에 상륙해 마을을 불태우고 노략질을 시작했다.

인근에 있던 가리포 첨사 이세린은 즉각 전남 지역 군사령관 원적에게 이 사태를 보고했다. 원적은 급한 대로 인근 병력을 데리고 달량으로 출동했다. 먼저 달량성으로 들어가 왜구를 묶어놓고, 증원 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원적의 작전이었다. 그런데 구원병이 도착하자 갑자기 60척의 왜선이 더 나타났다. 처음 나타났던 11척은 미끼였다. 조선의 군사 시스템을 잘 알고 있던 왜구가 일부러 소수 병력을 먼저 보내 구원 부대를 유인했던 셈이다.

왜구는 성을 넘어 들어와 병사들을 학살했다.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과 장흥 부사 한온이 피살됐다. 병마절도사가 왜구에게 살해된 것은 조선 건국 이래 없었던 치욕이었다. 이것이 을묘왜변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달량성이 함락되고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던 5월 22일, 조정에서 갑자기 뜬금없는 제안이 나온다. ‘급히 화포를 만들어야 하니 남대문과 동대문에 걸어둔 동종을 녹여 총통을 주조하자’는 내용이었다. 이 종은 원래 정릉 원각사에 있었는데, 매일 시간을 알려주는 종소리가 성문에서 잘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대문과 남대문에 걸어뒀다. 성문에 사찰의 동종이 걸려 있으니 유학자들 눈에 거슬렸던 것 같다. 그래서 을묘왜변을 구실로 보기 싫은 종을 없앨 생각을 했다.

종을 성문으로 옮겼던 사람이 중종 때 악명 높은 간신으로, 끝내 처형된 김안로였다는 점도 문제였다. 좀 더 합리적인 이유를 든 사람도 있었다. 민가에서 쇠를 거두면 민폐를 끼친다거나 총통을 만들려면 재료가 좋아야 하는데, 불가의 동종은 최상의 재료로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아무리 그래도 국가가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데 이런 비상 요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명종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명종 때 억불 정책을 완화하고 불교를 지원했던 것이 사실이라 관료들은 흥분했다. 그 종이 어렵다면 전국 사찰의 종을 녹여 총통을 만들자는 수정안까지 나왔다. 국왕과 신하들 간에 벌어진 이 논쟁은 왜구가 철수한 뒤에도 몇 달간 계속되면서 마침내 왜변보다 종을 녹이는 일이 더 심각한 논란거리로 부상했다.

군사적으로 볼 때 을묘왜변은 반성할 것이 참 많은 사건이었다. 조선의 군비와 전쟁 대처 능력도 그렇고, 왜군이 조선의 전술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심각한 문제였다. 여기서 교훈을 잘 찾았다면 국방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과 점검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 성문에 걸린 종은 사태를 엉뚱한 방향으로 몰고 갔다. 결국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를 경험해야 했다. 개인의 탐욕, 이기심이나 열등감, 특정 가치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엉뚱한 논란을 가져와 국가와 조직에 치명적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임 용 한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

※ 이 글은 동아비즈니스리뷰(DBR) 34호(6월 1일자)의 ‘전쟁과 경영’ 코너에 실린 글을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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