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제동]아빠들을 부탁합니다

  • 입력 2009년 3월 17일 03시 37분


제 눈을 끄는 광고가 한 편 있습니다.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서 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꼬마가 씩씩한 얼굴로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곤 말하죠. “아빠를 부탁해.” 드라마에서, 소설에서 많은 아빠를 만납니다. 한없이 자상하고 든든한 아버지가 있고 가족의 마음을 읽으려 들지 않는 권위적인 아버지도 있고 너무 약한 모습으로 무너지며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아버지도 있습니다. 실제 생활에서도 많은 아빠를 만나지요. 이제 겨우 아빠가 된 친구의 행복에 겨운 얼굴도 만나고, 늙어가는 아버지를 이야기하며 술자리에서 목소리가 잠기는 친구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게는 늘 부러운 모습의 하나입니다.

제 아빠는 제가 백일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몇 장 남지 않은 사진으로 만나볼 수밖에 없지요.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 거울을 보며 몇 번씩이나 같은 말을 연습하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저는 어린 시절 남몰래 사진을 보며 연습 같은 것을 했습니다. 아빠! 아빠? 아빠…. 늘 궁금했죠. 아빠를 갖는다는 것, 아버지의 늙어감을 지켜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슈퍼맨처럼 힘이 센 남자, 악당이 와도 나를 보호할 커다란 남자, 나만의 전용 슈퍼맨이 세상에 한 명 있다는 느낌, 세월이 흘러 슈퍼맨이었던 남자가 내게 기대어 올 때의 당혹감, 마침내 망토를 완전히 내려놓은 채 초라한 뒷모습으로 걸어가는 남자를 바라보는 서글픔.

요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내가 알 수 없었다고 생각한 느낌을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아버지의 역할까지 해준 어머니가 있으니까요. 유난히 아버지에 대한 소설이나 드라마에 가슴이 저미곤 했던 이유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픔이 아니라 저를 키워주신 어머니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이면서 아빠였던 어머니였으니까요.

늙고 지쳐 초라해진 ‘슈퍼맨’

모두가 힘든 시기라고 합니다. 경제적인 상황에서 비롯됐으니만큼 누구보다 힘든 건 아버지일 겁니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 안에서 사람은 누구나 역할을 강요받으며 삽니다. 여자는 여성스러움을 은밀히 강요받고 남자는 대놓고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강요받고 어머니는 여전히 희생을, 아버지는 여전히 가족의 생계를 떠안고 살도록 말이죠. 가장 힘든 사람이 절대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것, 가족을 위해 일을 하는데, 아니 일만 하다 보니 가족과는 점점 멀어지는 모습. 그런 점이 아빠들의 슬픈 딜레마라는 생각을 합니다.

얼마 전 ‘일리아드’에 나오는 헥토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단 한 번도 스스로 투구를 벗은 적이 없는데 아이가 투구를 쓴 아빠의 모습을 무서워하자 헥토르는 망설임 없이 맨얼굴을 보였다고 합니다. 아이를 위해 자신의 보호막이자 자존심 같았던 투구를 벗어던진 헥토르처럼 우리 아빠들도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놀러 가자는 아이 앞에선 일요일 오전이라도 푹 자고 싶다는 최소한의 게으름까지, 일찍 들어오라는 아내의 말 앞에서는 퇴근 후 포장마차에서 즐기는 한잔의 여유까지, 때로 상사 앞에선 버릴 수 없을 것 같았던 자존심까지 모두 다 벗어던진 채 말입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해 더 많은 상상을 해봅니다. 아버지가 있다면, 그래서 요즘처럼 힘든 시절을 겪는다면 그런 걸 해드리고 싶습니다. 신발 밑창을 푹신푹신하게 갈아놓는 일, 출근할 때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밀며 “오늘은 점심을 뭘 드시든 간에 보통 말고 ‘특’이나 곱빼기로 드세요”라고 웃으며 말해보는 일, 아버지가 좋아하는 단팥빵 하나를 주머니에 넣어드리는 일, 늦게 퇴근한 아버지를 위해 순대와 소주 한 병의,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술상을 준비하는 일.

자주 웃으며 이야기 건네보자

뭐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겁니다. 무뚝뚝한 건 아버지뿐이 아니죠. 사춘기를 벗어난 모든 아들과 딸이 자기 방문을 닫는 순간부터 더 무뚝뚝하니까요. 저 역시 마음은 안 그런데 쑥스러워서 다정하게 대해드리질 못합니다. 용돈이나 보내 드리며 “맛있는 것 사 드세요. 옷은 따뜻하게 입고 다니세요. 감기 걸리면 큰일 나요”라고 심드렁하게 말하는 게 다죠. 전화로 그런 말이라도 하고 나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낫다고 위안합니다.

아버지의 짐을 나눠진다는 일은 처음부터 불가능한지 모릅니다. 어차피 자식은 평생 아버지의 어깨에 앉아 세상을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아버지들은 어깨에 올려놓은 자식을 짐으로 여기지 않지요. 팔이 어깻죽지에 달려 있듯이 자식을 올려놓은 채 살아가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깨 위에서나마 아버지를 향해 많이 웃고 많은 이야기를 건네며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말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제가 가장 해보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말해보는….

김제동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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