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서영아]“여보 걱정 마, 당신이 최고야”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2월 23일 02시 54분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개혁을 외치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권 시절 일본에서는 ‘자기책임’이란 말이 유행했다.
가령 2004년 이라크에서 외국인 인질 살해 사건이 잇따르던 무렵 20대 일본 청년이 대책 없이 이라크에 들어갔다가 납치돼 살해됐다. 여론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정부 경고를 무시하고 이라크에 들어간 것은 ‘자기책임’이란 것. 청년의 부모는 언론에 얼굴 한 번 드러내지 못하고 대리인을 통해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사과만 반복했다. 청년의 집에 비난 전화나 팩스가 쇄도했다는 후문도 들려왔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 때는 ‘KY(구키가 요메나이·분위기 파악을 못한다)’라는 말이 풍미했다. 그는 상황 파악을 못하고 개헌 등 이념 문제에만 집착하다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대패해 지금의 자민당 위기를 낳았다. 아소 다로(麻生太郞) 정권에서는 다른 뜻의 ‘KY(간지가 요메나이·한자를 못 읽는다)’가 유행하더니 요즘은 ‘메이소(迷走)’란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혼돈에 빠져 달리는 상태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다. 자신이 속한 국가, 사회, 개인의 자리가 어디쯤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100년에 한 번’이라는 경제위기를 맞이해 요즘 일본에서는 ‘자기책임’만을 내세웠던 고이즈미 개혁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신문에서는 ‘케인스와 마르크스의 복권’이 주창되고 ‘시장주의의 파멸’ 등의 단어가 춤을 춘다.
지난해 말에는 ‘미국식 구조개혁 전도사’를 자임했던 나카타니 이와오(中谷巖) 전 히토쓰바시대 교수가 ‘자본주의는 왜 자멸했는가’라는 책을 통해 ‘전향’을 선언했다. 규제완화와 무한경쟁, 글로벌 스탠더드를 기조로 한 구조개혁은 빈부격차 확대나 환경오염을 낳고 일본사회 고유의 유대관계를 붕괴시키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는 최근 “시장과 국가 사이에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있는데, 일본의 구조개혁은 시장에만 의존하고 사회를 무시했다”고 고백했다.
이런 가운데 언론에서는 일본이 기댈 ‘최후의 보루’가 무엇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그것이 ‘지역사회’라거나 ‘무사도’ ‘일본의 미의식’ 등의 주장도 잇따른다.
이들의 논의를 지켜보며 한국이 기댈 최후의 보루는 무엇일까를 생각하다 보니 근래에 뉴스를 보며 의아했던 점이 떠오른다. ‘잃어버린 10년’을 겪은 일본 기업은 이번에는 가차 없이 해고를 단행하고 있는데, 사원 숙소에서 쫓겨난 해고 근로자들이 인터넷 카페나 노숙 말고는 갈 곳이 없었다.
한국 같으면 친지 등 어딘가 의탁할 곳이 있을 법하건만, 그 같은 안전판은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이 풍요로운 나라에서 ‘주먹밥이 먹고 싶다’는 일기를 남기고 굶어죽는 사람이 생겼을까. 그렇게 보면 한국인은 행복한 편이란 생각도 든다. 가족과 이웃이라는 안전망이 아직 살아있으니.
“여보, 걱정 마, 일본에서 최고야!”
며칠 전 로마에서의 ‘횡설수설’ 기자회견으로 물의를 빚은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전 재무상이 귀가했을 때 집 앞에 진을 친 기자들의 마이크에 그의 부인 목소리가 잡혔다. 요즘 일본에서 가장 망신살이 뻗친, 가장 좌절의 나락에 빠졌을 가장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이 목소리에서 ‘그에게도 마지막으로 도망칠 곳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기댈 최후의 보루는 무엇일까. 불황은 사람의 마음에도 찬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움츠러든 마음은 더 큰 불황을 낳는다. 지금이라도 주변을 둘러보고 서로를 격려해주는 건 어떨까. “당신, 걱정 마, 한국에서 최고야!”라고.
서영아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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