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다보스포럼과 맥베스

  • 입력 2009년 2월 2일 02시 58분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여는 다보스포럼은 경제만의 토론장이 아니다. 과학 인종 디지털 등 다각도에서 경제를 진단한다. 규모에 비해 명쾌한 해법은 부족했지만 지난달 28일 개막해 5일간 열린 이번 포럼에서는 ‘위기 이후의 세계’를 주제로 글로벌 경제위기를 다뤘다.

포럼의 222개 세션 중에는 ‘다보스문화포럼’이라고 할 만큼 문화의 관점에서 경제를 다룬 토론도 많았다. ‘엔터테인먼트의 미래’ ‘왓 이즈 굿디자인’ 등 여러 문화 세션 중 기자가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를 소재로 경제위기의 원인을 파헤친 ‘리더십 레슨스 프롬 맥베스’다.

‘맥베스’의 줄거리는 스코틀랜드 귀족 맥베스가 마녀들의 꼬임에 빠져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지만 내내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목숨은 물론 모든 것을 잃는다는 내용이다. 이미영 백석대 어문학부 교수는 을유세계문학전집 해설에서 “‘맥베스’는 인간성과 악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녔다”고 설명했다.

셰익스피어 연극의 명배우인 로렌스 올리비에 경의 아들 리처드 씨는 이 세션에서 “맥베스의 음울한 마법이 다보스에서 공명을 일으키고 있다”며 “그것은 탐욕스럽고 피로 범벅된 흉악한 생각이 어떻게 탐욕스럽고 흉악한 영혼을 끌어당기는가에 대한 문제”라고 말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전했다.

그에 따르면 맥베스의 탐욕은 오늘날 돈의 환상에 빠진 인간의 탐욕이고, 맥베스의 탐욕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꼬드긴 마녀들은 곧 투자은행이라는 것이다. 미국 금융 공황에서 시작한 경제위기는 물질에 대한 환상과 그 마법에 취한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에 ‘경제적 귀신 쫓기(Economic Exorcism)’가 필요하다는 말도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도 불황 대책이 잇따르고 있지만 ‘맥베스의 교훈’으로 보면 무엇보다 온갖 금융파생상품을 앞세워 ‘머니 게임’으로 질주했던 최근 몇 년간, 우리를 몽롱하게 했던 탐욕의 귀신을 쫓아내는 게 먼저인 것 같다.

지난 연말 정의채 몬시뇰(명예 고위성직자)과의 점심 자리에서도 같은 말을 들었다. 정 몬시뇰은 “정치도 엉망이고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문제는 끝을 모르는 물질문화”라며 “국민 의식을 지배하는 문화의 시각에서 출발하지 않고선 위기에 대응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윤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도 지난달 말 동아연극상 시상식장에서 “(연극이 더 어렵게 된) 오늘날 경제위기는 부도덕과 도덕의 해이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이미 구조조정과 실업의 고통이 불거지는 상황에서 웬 ‘문화 타령’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10년 전 외환위기를 일찍 극복했던 비결은 집안에 간직해 둔 금붙이를 앞다퉈 갖고 나올 만큼 위기에 강한 우리 문화의 힘이었다.

그 힘은 세계적인 석학도 인정한 바 있다. 고(故) 새뮤얼 헌팅턴은 미국 하버드대 교수 시절인 2000년 ‘문화가 중요하다’라는 책에서 “1960년대 초 한국과 가나의 경제 상황이 비슷했는데 30년 뒤 한국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며 “검약 근면 조직 규율 등 한국인의 가치와 문화가 결정적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의 진단은 칼바람을 헤치고 살얼음판을 가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 안의 맥베스를 쫓아내고, 우리의 긍정적 가치와 문화를 다시 불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내년 다보스포럼에선 ‘한국 문화와 위기 극복’이라는 세션이 열리길 기대한다.

허엽 문화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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