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이태동]수필, 붓 가는 대로 쓰는 장르일까

  • 입력 2009년 1월 3일 02시 56분


19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윌리엄 모리스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21세기에 찾아오게 될 유토피아에서의 인간은 산업화의 짐과 노역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책 읽고 글 쓸 수 있는 여가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진부한 이야기 수준 못 벗어나

유토피아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21세기의 정보화사회는 많은 부분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한국사회도 후기산업사회로 진입하게 됨에 따라 많은 사람, 특히 여성을 가사노동으로부터 적지 않게 해방시켰다. 이에 따라 적지 않은 여성이 여가 속에서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사회적으로는 물론이고 문화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러한 현상이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지는 않는 것 같다. 일부 사람의 경우 글쓰기에 대한 그들의 성급한 욕망이 ‘문학의 성역’을 ‘허영의 시장’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들 가운데는 물론 탁월한 문학적인 재능을 가지고 오랜 시간에 걸쳐 각고의 수련을 거친 끝에 훌륭한 작품 활동을 하는 극소수의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수필가의 작품은 지적인 감동을 주는 삶의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일상적이고 진부한 ‘이야기’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이렇게 부끄러운 글을 쓰는 이유는 문학에 대한 지식이나 인식 부족으로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쉬운 장르로만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필 장르를 처음 만든 미셸 몽테뉴의 위대한 작품을 조금이라도 깊이 있게 공부하고 글쓰기의 전범으로 선택했다면 수필이란 장르가 깊은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결코 쓰기 쉬운 장르가 아님을 발견했을 것이다.

대부분은 수필 공부를 하면서 폭 넓은 문학적 스펙트럼을 갖지 못하고, 대개 특정인의 수필을 모범적인 텍스트로 삼고 그것에 묶여 모방하는 자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면 그런 작품은 아름다운 글이기는 하나 만고불변의 귀감이 될 만큼 고전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작품 자체의 가치보다 문학 외적인 요소와 대중성에 호소하는 낭만적인 취향이 인기를 끄는 경우가 더 많다.

예일대의 해럴드 블룸은 몽테뉴가 프랑스 에세이스트였지만 몰리에르와 짝을 이루어 프랑스 문학사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사의 정전(正典)에 오른 위대한 예술가라고 평가했다. 몽테뉴는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적수인 희극작가 몰리에르의 아버지였고 에머슨과 니체의 스승이었으며 파스칼의 극복 대상이었다.

‘삶의 진실’ 찾는 독창성 있어야

평론가들은 그를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는 데 프로이트에 비견할 만한 탁월한 인물이라고 주저하지 않고 말한다. 톨스토이가 아스타포프 역장 집에서 임종할 때 그의 침상 곁에 몽테뉴의 ‘수상록(Essai)’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와 함께 놓여 있었을 정도로 그의 문학적 영향력은 대단했다.

몽테뉴가 예술가로서 높은 경지에 도달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치열한 사색과 명상, 방대한 양의 독서 결과였다. 그는 글쓰기 재료를 찾기 위해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는 물론이고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의 책을 샅샅이 뒤졌다. 그는 ‘신은 숨어 있지만 도달할 수 있다’는 파스칼과 달리 ‘신은 숨어 있지 않지만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항상 인내심을 가지고 신의 선물을 기다리며 철학적 여백의 미학을 보였으며, 일원론적인 입장에서 “영혼을 기쁘게 하기 위해 육체에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아주 독창적이었기 때문에 에머슨은 “그의 언어를 칼로 베면 피가 흐를 정도로 살아 있다”고까지 말했다.

수필 쓰는 사람이 2000명을 넘는다는 사실이 반드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질서한 일상적인 삶에 묻혀서 침몰하기를 거부하고 의식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글을 쓰는 일은 여간 고맙지 않다. 그들 가운데 몇이라도 타성적이고 판에 박힌 글쓰기의 틀에서 벗어나 몽테뉴처럼 ‘삶의 진실’을 새롭게 발견하는 독창적인 수필을 써서 다른 장르의 문학을 능가하는 가능성을 보일 수 있다면 더없이 좋다. 그것이 불가능하더라도 글쓰기를 위한 그들의 노력은 미래의 역량 있는 작가가 되기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아무쪼록 한국 수필가들도 스스로의 명예와 문학의 고귀한 영역을 지키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자세로 훌륭한 글을 써서 수필이 결코 저잣거리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아무나 쓸 수 없는, 값지고 귀중한 언어예술임을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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