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하태원]美토론주제서 남북한 빠졌다

  • 입력 2008년 12월 25일 02시 58분


‘제5부(府)’의 권력기관으로 불리는 미국 싱크탱크는 워싱턴의 한국 특파원에겐 한국에서 맛볼 수 없는 새로운 재미를 주는 곳이다.

특히 4년마다 찾아오는 정권교체기를 맞아 300여 개의 두뇌집단이 차기 행정부의 정책방향이나 우선순위를 놓고 벌이는 논쟁은 향후 미국이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흐름을 제공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에게 중요한 정책적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진보센터(CAP)가 대선 직후 내놓은 657쪽 분량의 ‘미국을 위한 변화: 제44대 대통령을 위한 진보 청사진’이라는 정책제안서는 대표적인 사례다.

8년 만의 정권교체를 계기로 그동안 헤리티지재단과 미국기업연구소(AEI)에 내줬던 주류 싱크탱크의 위상 회복을 자신하는 브루킹스연구소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분야별 정책 대안을 쏟아내고 있다.

주미 한국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미국의 힘을 느낄 수 있는 현장”이라며 “역대 행정부의 경험과 외국의 모범사례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통해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공론화 과정에서는 반드시 치열한 토론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 배울 만하다”고 말했다.

17일 국가정책연구소(CNP)에서는 ‘미국과 세계’라는 책 출판을 기념해 이 책의 공동 저자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브렌트 스코크로프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참석한 좌담회가 열렸다.

각각 민주당 지미 카터 대통령, 공화당 제럴드 포드와 조지 부시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두 사람의 대담은 미국이 최소한 외교안보 정책에서만큼은 초당적인 협력을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달라진 안보환경과 오바마 당선인의 외교정책에 대해 토론을 벌인 이들은 초당적으로 구성된 오바마 당선인의 외교안보팀에 대한 기대와 제임스 존스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의 역할에 대한 조언을 내놓았다.

특히 재임 시절 대통령의 눈과 귀를 독점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브레진스키 전 보좌관은 “국가안보보좌관은 대통령의 뜻을 정확히 대변하는 것은 물론 ‘선의의 중재자’가 될 필요가 있다”고 말해 좌중의 공감을 얻었다.

1시간가량 이어진 이날 토론에서 두 전직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중국, 러시아 문제 등 미국이 당면한 국가안보 현안을 차례로 짚어 나갔지만 북한 핵문제를 비롯한 한반도 문제는 끝내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북핵 문제가 논의 대상에도 오르지 않은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미국 내에서는 검증의정서를 채택하지 못한 채 최근 성과 없이 막을 내린 베이징(北京) 6자회담을 계기로 ‘북한=국제적 거짓말쟁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한결 강해진 것 같다는 분위기가 읽혀졌다.

게다가 워싱턴에서는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상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한국 국회의 난장판 모습이 ‘과격한 한국식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회자(膾炙)되고 있는 양상이다.

한미 통상 현안에 밝은 한 연구원은 “한국의 여당이 얼마나 한미 FTA의 비준을 바라고 있는지 가장 확실하게 증명한 경우라고 볼 수 있지만, 미국 민주당이 크게 감동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1년 동안 미국 곳곳의 크고 작은 취재의 현장에서 느낀 한국의 국가 위상은 자부심을 느낄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십 년간 어렵게 쌓아올린 국가 이미지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은 한순간인 것 같아 씁쓸하다.

하태원 워싱턴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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