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승련]대변인에게 ‘악역’ 요구하는 정당

  • 입력 2008년 11월 11일 02시 58분


본보가 지난해 8월∼올 9월 여야가 낸 논평 1000건을 분석해 비판지수를 산출해 보도한 10일 여야 정당의 전현직 대변인들은 나름대로 할 말이 많았다.

과거 대변인을 지낸 한나라당 A 의원은 “초선 대변인의 비판지수가 1점대가 뭐냐. 재선인 수석대변인의 점수보다 낮다는(순하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같은 당 B 의원도 “맞다. 초선이 몸을 사리지 말고 당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의원은 초선인 조윤선(1.3) 윤상현(1.8) 대변인의 비판지수가 재선의 차명진(2.0) 수석대변인보다 낮은 것을 마뜩잖게 여겼다. 비판지수가 높으면 비판 강도가 더 셌다는 뜻이다. 결국 당이 요구하면 공격적 논평을 내놓아야 하며 선수가 적을수록 더 충실히 지도부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논리다.

야당의 한 현직 대변인도 “논평할 사안마다 내가 당론에 전부 동의하는 건 아니다”라면서도 “하지만 대변인에겐 개인 입이 없다. 의견이 좀 달라도 당론에 맞춰 표현해 왔다”고 말했다.

물론 대변인이라고 고민이 없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과 당의 요구 사이에서 번민한다.

야당 대변인을 지낸 한 인사는 “마이크를 잡고 논평을 읽어 내려간 내게 ‘나는 선동가인가’, ‘나는 왜 국민에게 거리로 나설 것을 요구하는가’라고 자문해본 일이 있다”고 토로했다.

역시 야당 대변인을 지낸 또 다른 인사는 “표현이 독해도 콘텐츠가 있으면 그나마 낫다. 문제는 알맹이 없이 말만 독한 경우”라면서 “하지만 별다른 정치적 무기가 없어서 ‘말의 비중’이 높은 야당은 (언론이) 좀 봐줘야 한다. 야당은 구조적으로 대변인에게 (독하게 공격하는) 악역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결국 여야 대변인들은 ‘공격성’이 당에 대한 의무로 평가받고 있는 정치구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친 논평을 낸다는 게 한결같은 고백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소속 당에 기반해 정치적 입지를 다질 수밖에 없는 대변인들에게 국민을 보고 소신을 펴라는 얘기는 공허한 주문일지 모른다.

결국 대변인을 정쟁의 도구로 삼아온 정치권이 차제에 잘못된 관행을 바꾸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유권자들이 이를 격려해줘야만 품격 잃은 논평의 남발을 막고 바람직한 선진 정치를 지향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김승련 정치부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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