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한면수]과학수사 ‘CSI 수준’ 되려면

  • 입력 2008년 11월 10일 03시 03분


몇 년 전 경기도의 모 경찰서에서 강간미수범으로 수사를 받던 용의자의 유전자(DNA) 감정을 의뢰받은 적이 있다. 뜻밖에도 이 용의자의 DNA는 당시로부터 3년 전에 제주 서귀포경찰서 관내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피해 여성의 옷에 묻은 한 방울의 혈흔 DNA와 동일했다. 그래서 수사관에게 전화를 걸어 “3년 전에 제주도에 간 적이 있지?” “거기서 한 여성을 살해했지?”라고 묻도록 했다. 제주도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별 탈 없이 잘 지내던 용의자는 질겁했고 범행 사실을 털어놓았다.

현재 사용하는 과학수사기법 중 유전자 감식은 생명공학기술(BT) 정보기술(IT) 나노기술(NT)의 발달과 접목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극소량의 혈흔으로도 DNA를 찾을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유전자 감식은 사람을 구성하는 세포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범죄수사에 이용되는 사람의 DNA는 극히 일부이다. 한 가닥의 모발, 한 마리의 정자, 범인이 사용한 마스크나 모자에 묻은 사람세포만 확보해도 된다.

하지만 이런 첨단기술도 사람세포가 없으면 소용이 없다. 과학수사를 하려면 증거를 찾기 위해 범죄현장 보존, 신속한 신고, 자세한 정황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쓰레기통에 버려진 물건까지 뒤져 세포를 찾아야 한다. 범죄현장에 버려진 쓰레기가 DNA 주인, 다시 말해 범인을 알고 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사람이 지닌 DNA는 평생 변하지 않는다. 혈액 타액 모발 등 신체의 어느 부분에서 얻어도 동일성을 지닌다. 이런 원리로 특정 범죄자의 DNA 자료를 국가가 관리하는 유전자 자료은행이 영국을 비롯해 선진 40여 개 나라에 설치돼 있다. 관련 법률을 만드는 나라까지 합치면 70개국을 넘는다.

유전자 감식은 6·25전쟁 전사자 신원 확인, 독립유공자 후손 확인, 실종아동 입양아 및 이산가족 찾기, 국적 회복 등 수사 이외의 목적에도 사용한다. 그뿐만 아니라 동식물의 종(種) 식별을 통해 동물 보호, 어종의 수렵 및 남획 증명, 식물 혈통 보존 및 증명, 인류의 이동로 추적 등 응용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정부기관과 시민단체는 소모적인 인권시비 논쟁을 중지하고 유전자 자료은행 설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우리에게 과학수사는 미국 TV 드라마 ‘CSI’로 많이 알려졌다. 미궁을 헤매던 사건이 만능 법의학자와 첨단장비에 의해 해결되는 장면을 보면 나 스스로의 무능력에 한숨이 나온다. 그렇지만 CSI는 픽션이다. 아직은 사실과는 좀 더 동떨어져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문제는 국민의 기대치가 CSI에 나오는 수준에 가 있다는 점이다.

서래마을 영아유기사건이 보여주듯 한국의 과학수사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시스템은 미흡한 면이 있다. 230개가 넘는 경찰서에서 1년에 2만5000여 건에 대해 7만여 종의 유전자 감식을 의뢰하는데 겨우 30여 명의 DNA 전문가가 처리하고 있다. 대형 사고나 주요 사건이 발생하면 일상적 업무를 중단해야 한다. 또 시험 공간이 협소해서 증거물 간의 오염을 걱정할 정도이다.

DNA 분석 결과에 실수가 있으면 한 사람의 인생이 뒤바뀐다. 범인을 찾지 못하고 놓아주면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 우리의 과학기술 능력이면 충분히 세계 일류 수준에 이를 수 있는 블루오션이 과학수사이다. 정부의 관심이 문제이다. 국민은 이미 CSI 수준인데 정부 예산 담당자가 “아직 문제 없는데 왜 투자가 필요하느냐?”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국민에게 객관적이고 공정한 법 집행을 서비스하려면 과학수사 분야가 선진화되도록 정부가 적극적인 투자에 눈을 돌려야 한다.

한면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유전자분석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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