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탁환]지구는 왜 외국인만 지킬까

  • 입력 2008년 11월 6일 02시 58분


“‘벤 10’이 대세예요!” 석 달 전, 놀이터에서 초등학교 3학년 남학생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요즈음 즐겨 보는 애니메이션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뭘 그렇게 시시한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한목소리로 답했다. 치켜든 그들의 손목에는 똑같은 모양의 ‘벤 10’ 시계가 감겨 있었다. 부끄럽게도 그때까지 나는 ‘벤 10’을 시청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채널에서 언제 하는지도 몰랐다.

케이블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는 지상파 채널의 방송 프로그램만 확인하면 어린이 콘텐츠의 큰 흐름은 쫓아갈 수 있었다. ‘은하철도 999’ ‘미래소년 코난’ ‘날아라 슈퍼보드’를 따라 웃고 울며 보낸 세월이 짧지 않다. 케이블에서 어린이 채널과 애니메이션 채널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지상파 중심의 어린이 콘텐츠 시장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21세기의 어린이는 더 많은 채널을 통해 더 다양한 콘텐츠를 접한다. 지상파에서는 아침 혹은 초저녁에 어린이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시간이 고정되지만 케이블에서는 하루 종일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온다. 한 회가 끝난 후 부푼 기대를 품고 1주일을 기다리던 마음을 21세기 어린이는 알까.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1주일 내내 방영할 뿐만 아니라 하루에 서너 번 재방송을 하고 그것도 놓친 어린이를 위해 홈페이지에 다시보기까지 준비되어 있다.

‘아톰’∼‘벤 10’ 수입산 일색

‘벤 10’의 주인공은 벤 테니슨이라는 열 살 꼬마다. 그는 ‘옴니트릭스’라는 손목장치를 이용해 열 가지 우주 영웅으로 변신하며 활약을 펼친다. 인기가 높아지자 시즌을 달리할 때마다 새로운 우주 영웅이 속속 덧보태지고 있다. ‘슈퍼맨’이나 ‘배트맨’ ‘원더우먼’도 모두 변신 이야기다. 지금까지는 한 사람이 하나의 영웅으로만 변신해 왔는데 ‘벤 10’이 그 한계를 단숨에 돌파했다.

남학생들은 ‘다이아몬드’ ‘미니 그레이’ ‘섀도’ ‘메가조스’ 등 벤이 변신하는 우주 영웅의 장단점을 속속들이 안다. 그들은 우주 영웅의 역할을 나누어 맡은 후 자신들만의 ‘벤 10’ 놀이를 만들어 즐긴다. 여학생들이 ‘슈가 슈가 룬’이나 ‘파워퍼프걸’에 열광하는 동안 남학생들은 ‘벤 10’에 몰입한다.

뛰노는 모습을 한참 보고 있노라니 왠지 우울해졌다. 얼마 전 김종학 감독님을 뵈었다. 2007년 KBS에서 방영된 26부작 어린이 드라마 ‘이레자이온’의 기획과 제작에 그토록 거금을 투자한 까닭을 여쭸더니 깊은 웃음과 함께 답하셨다. “김 교수! 우리나라 어린이들이 열광하는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를 꽤 보았다오. 어느 순간부턴가 이상한 생각이 들더군. 왜 지구는 미국인과 일본인들만 지켜야 하죠?”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를 이끌어갈 신성장동력이 발표되었다. 문화콘텐츠도 22개 분야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세계시장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콘텐츠 개발도 중요하지만, 자라나는 어린이에게 희망과 긍지를 심어주는 콘텐츠를 만드는 일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다행스러운 점은 어린이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의 밑거름이 되는 어린이 책 시장이 꾸준히 성장한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외국 동화나 청소년 소설의 번역이 상당수를 차지하지만, 국내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과 어린이 책 기획자의 참신한 기획이 어우러져 어린이에게 사랑받는 작품이 잇달아 등장하고 있다.

어린이 콘텐츠 창작지원을

이 어린이 책의 신나는 기운을 어린이 드라마와 영화, 애니메이션으로 옮겨 와야 한다. 이를 위해 어린이 콘텐츠라는 큰 틀에서 전문가가 함께 머리를 맞댈 마당을 마련해야 한다. 전문가의 자발적인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정부 역시 부족한 제도는 보완하고 창작 지원이나 공모를 통해 어린이 콘텐츠를 북돋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벌일 일이다.

‘호랑이 선생님’이나 ‘사춘기’로 대표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생활 드라마에서부터 지구를 지키는 우주 영웅이 등장하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새롭게 정리하고 도전해야 하는 어린이 콘텐츠는 너무도 많다. ‘우주소년 아톰’에서 ‘벤 10’까지, 30년도 훨씬 넘도록 외국에서 사들인 콘텐츠로부터 대한민국 어린이들은 꿈과 희망을 나눠가졌다. 이제 대세를 바꿀 때다.

김탁환 소설가·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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