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상영]샤일록의 후예들

  • 입력 2008년 9월 18일 02시 59분


외환위기의 후유증이 끝나가던 2000년대 초 한국은 벤처거품을 경험했다. 매출실적이 아직 없거나 미미한 벤처기업의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한 코스닥 기업의 시가총액이 현대그룹 상장사 전체의 시가총액을 넘어서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사회 전체가 거품의 달콤함에 빠져 그것이 우리의 진짜 실력이라고 착각하면서 흥청망청했다. 상당수 이코노미스트와 애널리스트들이 ‘미래의 가치’란 그럴듯한 수사(修辭)로 광풍을 부추겼다. 결국 급격한 거품 붕괴로 꿈에서 깨어났을 때 혹독한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금융공학이 만든 초대형 거품

지금 우리는 벤처거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큰 금융거품이 꺼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무대가 세계 최대 부국인 미국인 데다 10년이 훨씬 넘게 지속돼온 시스템의 문제라는 점에서 그야말로 초대형 거품의 붕괴다. 실물경제의 뒷받침 없이 금융의 장난(소위 ‘금융공학’)으로 만들어낸 빚을 기반으로 한 경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가공의 부(富)였기 때문에 허상이 사라지는 것과 비슷하다.

미국에서는 금융이 첨단으로 발전하면서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과거에는 A 금융회사가 집을 담보로 잡고 대출해 주면 끝이었다. 지금은 A사가 이 대출을 담보로 주택저당채권(MBS)을 만들어 B 금융회사에 판다. B사는 다시 이 채권을 기초로 부채담보증권(CDO)이라는 파생상품을 만든다. 다시 이를 사들여 만든 2차 CDO 상품도 나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담보로 잡힌 집은 3억 원짜리지만 시중에 풀린 돈은 쉽게 10억 원을 넘어간다. 빚을 담보로 새로운 빚을 만들고 이를 담보로 또 빚을 만드는 구조다.

경제가 계속 팽창하고 집값이 오른다면 이런 시스템이 유지된다. 하지만 집값이 떨어지는 순간 선순환은 끝난다. 누구에게 순서가 돌아갔을 때 문제가 터지는지가 관건인 폭탄 돌리기 게임이나 다름없다. 어느 정도의 파생상품이 팔렸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폭탄이 터졌을 때의 피해도 가늠하기 힘들다. 이것이 이번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의 전말이다.

첨단 금융공학으로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어 팔던 미국의 투자은행들은 이제 도산했거나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다. 금융의 급격한 세계화로 각국의 금융회사들은 그물망처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위기는 즉각 다른 나라로 파급된다. 특히 미국이 진원지여서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미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은 현대적 금융기관이 생기기 전 초기 금융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가 샤일록을 부정적으로 그린 것으로 미루어 그는 돈놀이로 부를 쌓는 사람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샤일록은 현대의 금융공학자에 비하면 초등학생 수준도 되지 않는다. 지금은 만든 사람이 아니면 구조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파생금융상품으로 가공의 부를 창출한다. 파생금융상품에 대해서는 인간 탐욕이 만든 사생아라는 평가도 있고, 찰스 댈러라 국제금융협의회(IIF) 총재는 ‘독(毒)’이라고 했다.

실물 바탕 없는 금융경제는 붕괴

미국 최대 보험회사인 AIG에 대한 미 정부의 자금 지원으로 일단 최악의 위기는 넘긴 듯하지만 낙관하기에는 이르다. 다른 보험회사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비슷한 상황일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품 붕괴가 언제까지 진행될지 현재로선 가늠하기조차 힘들어 보인다.

이번 위기로 미국 중심의 세계 금융질서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금융시스템에 변화가 일어날 것은 분명하다. 무분별한 파생금융상품은 철퇴를 맞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투자은행을 선봉으로 세계 금융시장을 지배해온 미국식 자본주의는 또 한 번 변모하면서 진화할 것이다.

금융은 혈액(돈)을 원활하게 돌게 하는 핵심적 기능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림자의 영역이지 그 자체가 경제의 주인공은 아니다. 금융기법만으로 만들어진 부는 빚이고 거품일 뿐이다. 이번 위기로 우리가 교훈을 얻는다면 실물경제의 뒷받침 없이 지탱되는 금융경제는 언젠가는 붕괴한다는 사실이다.

김상영 편집국 부국장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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