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황상민]전의경 ‘마음의 병’ 심각하다

  • 입력 2008년 8월 13일 03시 01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참전 병사 사이에 알 수 없는 질병이 돌기 시작했다. 건장한 군인들이 갑자기 손이나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심지어 눈도 보이지 않았다. 총이나 폭탄에 맞지 않았는데, 픽픽 쓰러졌다. 전투를 수행할 수 없는 병사가 속출했다. 처음에는 이들을 겁쟁이나 애국심이 부족한 군인으로,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이유는 잘 몰랐다. 그 병은 이후 마음의 병으로 확인된, 신경증적 신체 마비 현상이었다. 약 100년 전의 일이다.

외부 압력으로 원치 않는 행동을 해야 할 때, 극단적인 공포가 지배할 때, 인간의 마음은 의식 상태와 관계없이 신체 기능을 때로 마비시킨다. 현대 과학은 마음의 병이 뇌에 의해 통제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뇌 손상이 있으면, 뚜렷한 심리적 이유가 없어도 마음의 병이 일어난다. 극단적 공포 상황과 뇌 충격이 동시에 있다면? 더 안타까운 상황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일상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방의무 대신 사회질서 유지에 참여하기를 국가로부터 명령받은 전·의경이다.

올해 계속된 촛불시위에 전·의경은 열심히 동원됐다. 전쟁도 아닌 상황에서 시민이라는 사람들과 온갖 격투도 벌였다. 때로 이유도 모른 채 뭇매도 맞았다. 격렬한 시위가 유발하는 폭력의 고통과 더불어 이들의 마음에는 알 수 없는 분노와 좌절감도 쌓였을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혼란이다. 이런 혼란이 심하면 심할수록 시위대에 대한 공격 반응도 격렬해진다.

전·의경이 노출된 무차별 폭력 상황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들이 겪는 사회적 정체성의 혼란이다. 심지어 초등학생들의 조롱거리가 된 이들의 존재 이유는 역할의 정당성마저 부정하게 만든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누구를 위한 법과 누구를 위한 사회 질서의 유지인가.

이런 질문이 마음속에 던져질수록 스스로 총알받이가 된 듯한 무기력감에 빠진다. 마음속에 분노와 적개심, 체념이 남는다. 대중이 만든 광기(狂氣)의 전선(戰線)에서 전투병사와 유사한 신경증적 문제를 보이기도 한다. 분명 전쟁 상황이 아닌데,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이렇게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전·의경이 갈등 상황의 집단 희생양이 되는 이 문제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그들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이들이 보호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이들은 법질서의 파수꾼인가, 아니면 사회 광기와 괴담에 맞서는 정권의 하수인인가?

아무리 사회 갈등을 스스로 수습할 역량이 되지 않는 사회라도 더는 이들을 대중 광기의 희생자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국방의무를 수행하는 이들이 정권의 방패막이 돼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이는 국가가 인간성을 어떻게 말살시키는지 국민에게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회 안전과 법질서의 집행을 위해 이들의 역할과 기여가 필요하다면,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가치와 인정을 보여줘야 한다.

시위대와의 접전에서 각목으로 머리를 맞아 뇌가 함몰된 채 쓰러진 전경을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으로 병원에서 퇴원시켰다고 한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했던 그 전경은 현재 몇 주째 실종 상태다. 전쟁보다 더 심한 생존의 전쟁에 처한 우리 사회이지만, 이런 전·의경의 이야기는 ‘광우병 쇠고기’를 먹기도 전에 광기에 감염된 대한민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전·의경이 더는 사회 폭력의 희생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실종된 전경대원이 빨리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황상민 연세대 교수·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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