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권희]공기업이 준 카드, 받은 카드

  • 입력 2008년 8월 3일 19시 56분


감사원 감사와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난 공기업의 일탈이 기가 막힌다. 이번엔 위아래로 법인카드를 주고받은 비리까지 적발됐다. 두 장의 카드에 전형적인 ‘갑을(甲乙) 관계의 부패’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첫 번째 카드는 증권예탁결제원이 감독관청인 옛 재정경제부(현재 기획재정부) 직원에게 건넨 법인카드다. 감사원에 따르면 증권예탁원의 모 본부장은 재경부로부터 회식비 지원 요청을 받고 법인카드를 건네주거나 대신 결제했다. 다른 본부장도 작년 재경부 일부 직원 송년회 회식비를 같은 방식으로 결제해줬다. 지난 3년간 이렇게 부담한 재경부 직원들의 술값은 3700만 원이었다.

두 번째 카드는 한국전력공사의 모 과장이 하청업체한테서 받은 법인카드다. 그는 작년 4월까지 2년 반 동안 전산분야 사업발주를 맡아, 공사를 따내려는 T사에 공사대금의 5∼15%를 리베이트로 요구해 2억3000만 원을 챙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2006년 T사의 법인카드를 골프, 해외여행 등에 썼다. T사가 카드를 회수하기 전까지 70일간 그가 쓴 액수는 1330만 원이었다.

증권예탁원은 주식거래에 대해 수수료를 떼는 수입으로 5년간 앉아서 3384억 원을 벌어 공기업 최고 연봉을 나눠 가졌고, 각종 구실로 직원들에게 수십억 원어치의 선물도 안겼다. 자신들도 평소 술 마시고 골프 치며 법인카드를 긁어댄 터여서 감독관청인 재경부의 술값쯤이야 법인카드 한 장이면 간단히 해결된다고 생각했을 만도 하다. 게다가 감독관청의 약점도 잡게 됐으니 일거양득이다.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공기업은 정부부처의 ‘밥’이나 다름없다. 각종 심부름을 대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민간기업들이 나서지 않는 새 정책에는 총대를 메기 일쑤다.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지금도 24개 정부부처는 공기업 직원 360명을 파견받아 인건비 부담 없이 부리고 있다. 퇴직하는 부처 공무원들은 으레 산하 공기업에 둥지를 튼다. 맞춤형 공생관계다.

공기업들은 또한 경쟁 없는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돈이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큰 사업을 벌이는 게 특기다. 이런 공기업 앞에는 T사처럼 발주사업을 따내려는 업체들이 줄을 선다. 공기업과 하청업체 간의 유착은 당연히 공기업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이를 메워주는 것은 물론 국민 세금이다.

정부-공기업-하청업체들은 이번 법인카드 비리를 ‘재수 없어 걸린’ 사례로 꼽을 것이다. 3자의 유착관계는 이보다 훨씬 깊고 은밀하기 때문이다. 검찰은 “수사결과 조직 비리는 찾지 못했다”고 했지만 공기업이 적자가 나면 혈세로 메워 흥청망청 사업을 벌이게 하는 정부가 정작 조직 비리의 당사자가 아닌지 되짚어볼 일이다.

이런 유착관계를 깨지 않는 한 정부부처가 공기업을 제대로 감독하기를 바라는 건 무리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를 외치다가 촛불시위에 눌려 이름도 ‘공기업 선진화’로 바꾸고, 시행도 각 부처에 맡겨버렸다. 공기업 노조들이 이런 분위기를 놓칠 리 없다. 노조도 ‘민영화 반대’에서 ‘구조조정 저지 및 자율경영 쟁취’로 구호를 바꿨다. 말이 좋아 ‘자율경영’이지, ‘내 멋대로 하게 놔두라’는 것이다.

휴가를 마친 이 대통령이 다시 ‘공기업 개혁 관철’을 다짐했다. 청와대가 진짜로 수술칼을 들 용기가 있기는 있는 건가.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