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종식]뇌물로 얼룩진 전산시스템 사업

  • 입력 2008년 5월 14일 02시 59분


“최근 배당된 사건의 절반 이상이 전산시스템 정비사업과 관련된 뇌물 사건입니다. 전산시스템 사업이 정보기술(IT)사회의 뇌물 구멍이 되고 있죠.”

서울중앙지법 부패사건전담재판부의 부장판사는 최근 기자에게 이같이 말했다. 실제로 이 재판부의 기일표는 전산시스템을 구축 정비하면서 납품업체 등에서 뇌물을 받아 재판에 넘겨진 공무원 및 공공기관 임직원의 사건으로 가득했다.

이 부장판사는 “전산시스템의 경우 전문가가 아니면 알기 힘든 분야인 만큼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한다는 명목으로 뒷돈을 챙기는 임직원이 늘고 있다”며 “통상적으로 뇌물 액수도 커서 일벌백계 차원에서 중형을 내리지만 관련 범죄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최근 남북교류협력 프로세스 혁신 사업자를 선정하면서 행정적 지원을 제공하는 대가로 후보 사업자에게 1억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통일부 소속 전자통신사무관 윤모(43) 씨에게 징역 5년의 중형을 내렸다.

또 서울지방항공청 정보시스템 구축사업자가 선정과정에서 특정 컨소시엄의 낙찰을 돕는 대가로 약 1억9500만 원의 뇌물을 받아 챙긴 양모(44) 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거듭된 중형 판결에도 불구하고 전산시스템 관련 비리 사건이 끊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법조계 인사들은 이 분야에 대한 일반인의 무지와 사업의 특수성을 꼽고 있다.

국토해양부 산하 공기업의 전산팀 직원은 “전산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하면 윗선에선 확인 없이 ‘묻지 마 지원’을 하는 게 사실”이라며 “일종의 ‘전산시스템 울렁증’이 심각하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한 수사 관계자는 “소수의 외국계 기업이 독점하는 국내 전산장비 시장에서 할인율을 통해 가격결정권을 행사하다 보니 금품로비가 관행처럼 굳어졌다”며 “전산시스템의 경우 한번 납품하면 업그레이드, 유지 보수 등 지속적인 수입이 보장되니까 후발 업체의 과당경쟁도 로비를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사후에 관련 기관은 “재발 방지를 위해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공언하지만 공염불에 그칠 때가 많다.

정보화 구축사업을 이용해 혈세를 횡령하고 뒷돈을 받는 관행은 정보화 사회를 망치는 나쁜 체질 중 하나다. 공공기관의 체질 개선이라는 거창한 구호에 매달리기보다는 이 같은 나쁜 체질부터 하나씩 고쳐나갈 때다.

이종식 사회부 bel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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