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승호]‘비비빅 물가’의 슬픈 추억

  • 입력 2008년 4월 18일 03시 01분


1994년 초여름 빙그레는 아이스바 ‘비비빅’의 생산을 중단하는 대신 양을 조금 늘린 ‘뉴 비비빅’을 내놓았다. 200원에서 300원으로 값을 50% 올리면서. 옛 경제기획원 물가국이 발칵 뒤집혔다. 하필 비비빅이 소비자물가의 지수품목으로 잡혀 있는데 이 때문에 전체 물가가 0.1% 남짓 오르게 된 것.

은밀히 연락이 갔다. “여차여차하니 200원짜리 비비빅의 생산을 재개해 주시오.” 압력이 통해 지표상 물가는 안정됐다. 비록 재개된 생산물량이 워낙 적어 대부분의 소비자는 뉴 비비빅을 사 먹어야 했지만…. 세무서 직원이 중국집을 돌며 자장면 값을 점검하던 시절의, ‘그야말로 옛날식’ 물가관리였다.

지난달 기획재정부 국세청 등 정부 4개 기관은 일부 원자재의 매점매석을 단속하겠다고 발표했다. 물가관리 52개 품목도 선정했다. 사재기한 사람은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가격이 오른다는 것은 “물건이 귀해졌으니 소비를 줄이라”는 신호다. 품귀가 예상되는데도 사재기 단속으로 가격을 붙들어 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소비가 줄지 않는다. 아껴 써야 할 미래의 자원을 싼값에 미리 당겨 낭비하는 꼴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값이 오를 품목을 매집 비축(민간이 하면 ‘사재기’라고도 부른다)해야 소중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쉽고 간명한 경제원리다.

한편 사재기 단속을 해봐야 가격안정 효과는 ‘초단기’에 그친다. 가격을 잡으면 한정된 물량을 조기 소진시켜 나중에 값이 더욱 급격히 치솟게 하기 때문. 뒤집어 말해 사재기는 시간에 따라 가격이 춤추는 것을 완화하는 효과도 낳는다. 선물(先物) 등 파생상품시장이 도박판처럼 보이지만 각국 정부가 활성화하는 것도 이 같은 시장안정 효과 때문이다. 사재기를 단속하겠다는 논리를 그대로 따르자면 가격 전망에 따라 현물 및 선물시장에서 물량을 잡았다 풀었다 하는 세계의 석유 및 곡물메이저, 투자은행(IB)들을 불러다 처벌해야 할 판이다.

물론 단속이 유효한 상황도 있다. ‘허생전’ 주인공처럼 수급에 이상이 없는데도 독점적 위치에 있는 자가 가격조작을 위해 매집하는 경우나, 단기 수급불균형만 넘기면 중장기 균형을 되찾을 대안(수입 확대 등)이 있는 경우라면 그렇다. 하지만 최근의 원자재 값 상승이 여기에 해당돼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강만수 재정부 장관은 이런 ‘비비빅식 물가 관리’에 몹시 비판적이다. 그는 ‘조세·재정정책 50년 증언 및 정책평가’(조세연구원·2003년)라는 책자에서 “지금까지 물가나 부동산 투기 억제에 국세청이 많이 나서곤 했는데 이런 건 없어져야 한다. 가장 하책(下策)이 아닌가 싶다. 근본적 대책은 어렵고, 하는 척이라도 해야 되니 이런 게 나온다”고 말했다.

소신과 다른 대책을 내놓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만큼 정책수단이 마땅치 않았을 강 장관의 깊은 고뇌가 느껴진다. 그러나 ‘경제대통령’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계속 이런 식이라면 곤란하다. 시장주의, 실용주의와도 영 거리가 멀다.

한때 TV 코미디에서 ‘복학생 코너’가 꽤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복고풍은 코미디나 패션에서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경제정책에서 말고.

허승호 경제부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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