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全 금융위원장, 벽 넘을 수 있을까

  • 입력 2008년 3월 19일 20시 00분


‘민간 전문가’인 전광우 씨가 금융위원장에 발탁된 것은 신선하게 느껴졌다. 하마평에 오르지 않았던 이가 돌연 화려하게 등장해서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인재 풀이 빈약하다’고 푸념하면서도 금융계에 새 바람을 몰고 올 인물을 용케 찾아냈구나 싶었다. 관료 출신도 아니고 정치적 ‘연(緣)’도 없는 그를 중용한 것은 금융산업을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새 정부의 진정성을 조금 더 믿게 한다.

전 위원장은 세계은행(IBRD) 이코노미스트 출신답게 국내외 금융 현안에 밝은 것으로 평가된다. 외환위기 이후 귀국해 재정경제부 장관 특보, 국제금융센터 소장을 거치면서 한국 금융의 약점과 관료들의 특성도 파악했다. 우리금융지주 부회장으로 일할 때는 ‘갑(甲)이 아닌 을(乙)’ 즉, 약자의 비애도 겪었다.

민간인 출신 금융위원장은 역시 관료 출신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은행 증권 보험 순으로 열렸던 상견례 간담회의 순서가 바뀌어 외국계 금융회사 대표들을 제일 먼저 만났다. 그는 여기서 개인 e메일 주소를 알려주며 “할 얘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고 부탁했다. 취임식은 짤막한 취임사로 대신했다. 직원들에게는 “앞으로 와이셔츠 차림으로 회의하자. 보고서는 1페이지로 핵심만 요약하라”고 했다. 금융 수장(首長)의 형식 파괴는 금융시장 불안으로 주눅이 든 금융계에 활력소가 되고 있다.

그가 맞붙어야 할 상대는 미국계 사모(私募)펀드 론스타와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상징되는 관료그룹이다. 전 위원장은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각 승인을 유보한다는 방침에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전임자들이 작성한 모범 답안을 토씨까지 그대로 내놓았다. 론스타 문제는 외자(外資)를 대하는 시각과 국민감정, 한국의 대외 신인도, 외자의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의 유효성이 복잡하게 얽힌 고차원 방정식이다. 론스타가 이미 원금의 85%를 회수했고 남은 지분을 모두 팔면 무려 4조 원의 차익을 챙긴다는 것도 분명 배 아픈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법원 판결을 기약 없이 기다리며 어정쩡한 상태를 지속하는 것이 국익에 유리한지는 원점에서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책임질 일은 미루는 게 상책’이라는 관료적 발상이 아니라면 전문가답게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정면으로 씨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 금융위 청사가 여의도에서 법원 근처 서초동으로 옮겨갔으니 법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사법적 판단을 서둘러 달라고 재촉하는 건 어떤가.

관료 조직과의 정면승부는 더 힘든 싸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 경제팀 지휘관을 자임하는 강만수 장관은 “재정부와 금융위의 인사 교류를 활성화하자”고 말했다. ‘거시경제와 금융을 두루 경험할 수 있게 하자’는 명분이지만 전 위원장의 강단을 시험해 보는 뜻도 있다는 게 금융계 해석이다. 금융 공기업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해 퇴직 후 한자리 챙기려는 속셈이지만 금융 관료의 전문성 부족이 시장 발목을 잡은 숱한 사례를 떠올리면 후안무치(厚顔無恥)한 발상이다.

관료들을 움직여 뜻을 펴야 하는 전 위원장으로선 공무원 조직의 이해(利害)를 무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관료의 논리에 빠져드는 순간 역대 민간 출신 장관의 실패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된다. 전 위원장이 벽을 넘어서야만 선진 금융과 만날 수 있다.

박원재 논설위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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