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유양선 할머니의 가르침

  • 입력 2007년 12월 13일 22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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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는 옛말이 있다. 돈 버는 가치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지만, 악착같이 벌어 품위 있게 쓰라는 뜻이다. 뒤집어 말해 ‘벌더라도 정승처럼 쓰지 못하면 개가 된다’ ‘무능하면 정승 될 생각은 말라’라는 의미도 된다.

이처럼 돈을 버는 가치와 돈을 쓰는 가치는 ‘한 몸’이다. 버는 것에만, 쓰는 것에만 집착하면 반쪽에 불과하다. 성장과 경쟁 등 우파의 가치와, 분배와 평등을 비롯한 좌파의 가치는 같은 몸의 두 얼굴인 셈이다.

이를 몸소 실천하는 할머니를 10일 밤 KBS 2TV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에서 봤다. 서울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젓갈장사를 하는 유양선 할머니다. 칠순 중반에도 새벽 장사를 나가는 할머니는 책 장학금 건물 땅으로 13억 원을 넘게 기부했다. 젓갈을 팔아 번 돈이다.

할머니는 이 방송에서 “못 배운 게 한이 돼 하버드대보다 더 좋은 대학을 지어 배우고 싶은 아이들을 배우게 하고 싶다”며 “학교에서 1등 했다는 편지를 받을 때 참 기쁘다”고 말했다. “돈이 생기면 추운 줄도 모르고 어깨가 으쓱으쓱해진다. 우리 사회가 좋아진 것도 모두 배운 덕분”이라고도 했다.

야근 뒤 오전 1시경 이 방송을 보다가 겨울 칼바람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못 배운 게 한이라는 할머니는 명문대를 부정하지도 않았고, 1등 하는 아이도 치켜세웠다. 한 달 가스비가 900원도 안 될 만큼 절약하면서도 부자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보면서 기자는 지난 10여 년간 한국 사회가 경제나 교육 철학을 두고 좌우로 편 갈라 싸워 온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할머니는 어려운 아이를 배우게 하는 것도, 명문대와 1등도 모두 필요하다고 했다. 잘살기 위해서 배워야(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그 평범한 말도 여름 소나기처럼 다가왔다.

어디 할머니만 그럴까. 우리 안에는 할머니처럼 경쟁 배려 평등 성장 분배 등 좌우의 가치가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면에 있는 좌우의 가치 중에서 하나를 억누르고 하나만 내세울 때 어처구니없거나 끔찍한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한다.

서울대 폐지론 등 대학 평준화를 주장하는 좌파 정치인이나 학자가 자식의 진학 문제에는 태도가 바뀌고, 특수목적고 폐지를 주장하면서 아이를 외국 명문고에 보낸 것도 그렇다. 현 정권이 분배와 평등에 집착해 성과와 경쟁을 억압하다가 살림살이를 나눌 것 없게 만들어 버린 실정도 대표적인 사례다.

우파도 아무리 명문대와 1등을 예찬하더라도, 나눔이나 배려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결코 더불어 살 수 없다. 우파의 경쟁력은 악착같이 번 돈이 아니라 그 돈을 정승같이 쓰는 데서 나온다. 우파의 경쟁적 교육관도 “남의 아이가 잘되어야 우리 아이도 잘된다”고 말할 때 인정받을 수 있다.

방송을 본 기자가 한국 사회의 ‘좌우파 10년 드잡이’를 떠올렸다고 말한다면 할머니는 “뭔 뜬금없는 소리여” 하실 것 같다. 그런데도 하나 더 여쭙고 싶은 게 있다. 할머니는 돈을 버는 데도, 돈을 쓰는 데도 한 치의 거리낌이 없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다시 길어 올려야 할 ‘시대정신’이 아닐까. 할머니께 시대정신이라고 했다간, 핀잔 들을 것 같아 엄두를 못 냈다. 그 대신 젓갈을 사러 가기로 했다.

허엽 문화부 차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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