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서병훈]‘화끈한 공약’에 박수 보낸 분들께

  • 입력 2007년 11월 3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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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뒤편으로 넘어간 줄 알았던 포퓰리즘이 세계 곳곳에서 부활하고 있다. 남미는 물론 유럽에서도 포퓰리즘 세력이 만만치 않다. 한국 사회에서도 지난 몇 년 사이에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부쩍 많이 나돌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금 특히 그렇다.

1870년대 러시아의 ‘인민 속으로’(나로드니키) 운동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포퓰리즘은 이름 그대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내세운다. 민주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다수 국민은 억압받고 착취당하고 있다. 포퓰리즘은 이 점을 파고든다. ‘국민 권리의 회복’을 위해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요구한다. 부패하고 타락한 기존 지배계층을 전면 해체할 것을 약속한다. 이런 논리에 대해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상황 변화를 두려워하는 수구세력이 아니라면 ‘민주 투사’ 포퓰리스트들에게 지지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겉과 속이 다르다. 개혁을 요란스럽게 외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세상은 ‘전(前)과 동(同)’이다. 국민은 여전히 들러리 신세이고 실속은 소수의 지배자들이 챙긴다. 포퓰리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비이성적인 단순논리를 확산시킨다는 데 있다.

포퓰리즘 기지개 유권자 현혹

포퓰리스트들은 세상을 ‘적과 동지’로 나눈다. 한마디로 ‘정치적 이원론’이 포퓰리스트 정치의 핵심이다. 정치적 이슈도 단순 이분한다. 좋은 것이나 나쁜 것, 옳은 것이나 그른 것으로 분리하고 대립시킴으로써 전선(戰線)을 명확히 하려 한다. 시중 사람들이 쓰는 어법을 의식적으로 흉내 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엘리트들이 자기 이익을 영구히 누리기 위해 일부러 말을 어렵고 복잡하게 한다는 것이다. 현실 문제에 관한 대안 역시 간단명료하면서도 직접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포퓰리스트들은 ‘여기, 지금’에 초점을 맞춘다. 언제든지 듣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것인 양 여길 수 있을 현안에만 힘을 쏟는다. 그 과정에서 현실에 맞지 않는 엉터리 공약이 남발되는 것은 물론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2000년대 초반을 전후해서 포퓰리즘을 찾는 식자가 많아졌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좌파 정부’의 ‘대중영합적이고 무책임한 인기정책’을 설명하기 위해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빌려 쓴 것이다. 한국 정치에다 포퓰리즘의 잣대를 갖다 대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나 포퓰리스트 정치를 연상시키는 현상이 일부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노무현 정권이 ‘분열과 대립의 정치학’을 즐겨 구사하는 것이 그 한 예가 된다. 노 대통령의 ‘의도된 막말’도 그렇다. ‘친노적’인 언론매체조차 ‘저열하고도 부박(浮薄)’하다며 비판 일색이지만, 이런 말투가 지지자들을 단단히 결집시킨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노 대통령 본인도 시인했듯이 ‘대중의 언어를 자극적으로’ 씀으로써 얻는 정치적 효과는 상당한 것이다.

많은 사람이 포퓰리즘의 출현을 걱정하지만 이것이 결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억눌린 다수 국민을 구하겠다는데 누가 그 명분을 외면할 것인가.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것이 민주정치의 본질이라면 정당한 선거운동과 지탄받아야 할 포퓰리즘을 구분하기도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포퓰리즘의 확산을 막을 마땅한 방도가 없다는 점이다.

엉터리 정치인들이 발을 디디지 못하도록 정치개혁을 해야 하지만 그것이 어디 쉬운가. 정치인을 믿을 수 없다면 국민의 깨어 있는 의식이 관건이다. 석유 비축 자금을 풀어서 기름값을 내려 주겠다는 선심성 공약에 미국인들은 등을 돌렸지만 아르헨티나에서는 박수를 보냈다. 우리는 어떤 수준일까.

깨어 있는 국민의식이 관건

또 있다. 거짓 공약을 걸러 주고 엄정한 비판의 눈길을 번득이는 집단이 있으면 국민 노릇 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걸핏하면 ‘감상법’ 운운하면서 흥행정치나 부추긴다. 공의를 생명으로 해야 할 시민단체들은 특정 이익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칭 ‘국민 정치인’ 포퓰리스트들이 활개 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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