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차라리 ‘장수’의 목을 쳐라

  • 입력 2007년 11월 7일 19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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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남북 정상회담’에서 두 장면을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한다. 우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일정 연장 제의를 노무현 대통령이 거절한 것이다. 김 위원장은 “대통령이 결심 못 하십니까. 대통령이 결심하면 되는데…”라고 했지만 노 대통령은 “큰 것은 제가 결정하지만 작은 일은 제가 결정하지 못한다”며 말려들지 않았다. 그렇다. 민주사회에서는 대통령이 결심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고, 대통령보다 더 센 데가 있는 법이다. 벌써 많이 까먹었지만 남북 정상회담 직후 대통령의 지지도가 한때 50% 이상으로 치솟은 것은 아마도 이 대목 때문이지 싶다.

대통령도 자기 마음대로 못해

또 하나는 김장수 국방장관의 꼿꼿한 태도다. 통치자가 아무리 맘대로 해도 똑똑하고 심지 깊은 신하가 있으면 나라는 결코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 사례다. 김 위원장의 면전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던 ‘무장(武將)’으로서의 김 장관의 자세는 김만복 국정원장의 황송해하는 듯한 태도와 비교돼 시중에는 ‘꼿꼿 장수, 굽실 만복’이라는 유행어가 떠돌아다닐 정도였다.

김 장관의 의전에 대해 군 야전교범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으나 군 원로들은 다른 견해를 피력한다. ‘머리를 숙이지 않는 군인의 악수 자세는 현역시절 제복을 입었을 때에 한하는 것으로 김 장관이 양복을 입고 국내외 고위 인사들을 만날 때 머리를 숙여 악수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봐 왔다’는 것이다. 68만 대한민국 국군의 수장으로서 다분히 의식적이었다는 얘기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사수를 주장해 온 김 장관은 군 통수권자인 노 대통령이 작심하고 “NLL은 영토선이 아니다”라는 ‘통 큰’ 발언을 하는 바람에 곤혹스러운 처지다. 그러나 김 장관은 참모들에게 “앞으로 내가 (NLL에 대한) 태도를 바꾸면 더는 김장수가 아니다”라는 견해를 밝혔고 국정감사에서도 “NLL 양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확인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최근 다시 NLL 사수론을 ‘땅따먹기’ 놀이에 비유하고 나서 논란의 불씨를 지폈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임기 중 어떻게 해서든 이 문제에 대한 협상의 물꼬를 트려는 생각인 것 같다. 일각에서는 “10·4공동선언에서 ‘남북한 서해 충돌 방지를 위한 공동어로수역 지정과 서해 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는 NLL 와해를 상정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렇다면 임기 끝 날까지 대통령으로서의 권한과 직분을 한 점 망설이지 않고 행사하겠다고 공언해 온 노 대통령은 이 시점에서 차라리 김 장관을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김 장관으로서는 우리 군이 반세기 이상 목숨 걸고 지켜 온 NLL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경질되는 것이 그의 명예와 자존심을 보전하는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정감사에서 일 점 망설임 없이 김 장관과 같은 맥락의 소신 발언을 한 해군과 공군참모총장도 마찬가지다. 장수에게 굽실은 불명예요, 소신은 훈장이다.

主君의 도리와 將帥의 기백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위대한 장수들은 항복을 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했고, 적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도 구차하게 목숨을 연장하기보다는 당당하게 명예를 지키는 길을 선택했다. 삼국지의 관운장이 그런 인물이다. 사려 깊은 주군(主君)이라면 올곧은 장수의 명예를 지켜 주는 것이 도리다. 군 통수권자 제대 말년인 노 대통령도 이제는 그만한 국량(局量)과 배려는 갖추고 있다고 본다.

부득불 NLL을 무력화하고 싶다면 이달 중 열릴 예정인 남북 국방장관회담에는 다른 사람을 내보내는 것이 협상의 진전에 보탬이 될 것 같다. 이 정권의 파격적 인사 행태를 염두에 둘 때 평소 NLL 문제에 관해 나름의 전문성과 독특한 소신을 보여 온 이재정 통일부 장관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북한도 쌍수(雙手)를 들어 환영할 것이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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