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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11월 2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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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국 상무위원 9명 중 나머지는 60대이다. 중국은 당정 엘리트에 대한 배양 기준이 있다. 혁명화 지식화 전문화 연경화(年輕化) 등이다. 혁명화는 공산당의 정체성을 위해서 강조해야 할 당위적인 목표라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중요한 점은 전문화와 연경화이다. 중국 지도부의 물갈이이자 재충전이다.
두 사람의 50대 상무위원 선출에는 보이지 않는 정치적 사회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시진핑과 리커창 말고도 리위안차오(李源潮)와 보시라이(薄熙來) 등 새 정치국원도 50대 초반이다.
현재 중국의 여러 분야에서 최상층을 이루는 세대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대체로 77, 78, 79학번 대학 졸업생이라는 사실이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후삼계(後三屆)라 일컫는다. 후진타오 주석이 시진핑과 리커창의 나이를 거론하며 특별히 젊은 지도자라고 소개했는데 이들 세대의 역사적 의미를 다시금 깨우쳐 주는 대목이다. 왜 77, 78, 79학번인가? 특별히 인물이 잘생기고 정치적 배경이 좋은 학생이 모였던 걸까?
중국은 1966년부터 10년간 문화대혁명이라는 대동란을 겪어야 했다. 한국이 같은 기간에 비약적 발전을 한 데 비해 중국은 모든 분야가 쑥밭이 되는 황폐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1976년 9월 마오쩌둥(毛澤東)이 세상을 떠나고 4인방이 타도되면서 문화대혁명은 막을 내렸다.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덩샤오핑(鄧小平)은 1977년 10월부터 과감하게 대학 교육을 혁신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과제가 대학입시(高考)의 부활이었다. 그해 12월에 치른 대학입시장은 눈물과 격동의 무대였다. 농촌과 공장 또는 광산에서 5, 6년 이상 생고생을 하며 ‘썩어야 했던’ 젊은이들이 새로 연 대학의 좁은 문을 두드렸다. 이들은 나이 차가 많았다. 대체로 1947∼55년생이 주축을 이뤘는데 이들 세대가 바로 ‘후삼계’이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대학은 이름만 있다시피 했고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다. 교수가 대거 쫓겨나고 학생들은 매일 매일 마오쩌둥 주석의 사진이 든 어록집을 들고 사상 학습과 혁명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공농학원(工農學員)이라 해서 공장이나 농촌, 군대에 있는 사람 중에서 극히 소수의 사상성이 좋은 사람을 골라서 대학으로 보냈다.
1977년 대학입시의 부활은 여기서 탈피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교육 혁명의 여명이었다. 여명의 세대는 이제 중국 중심부에 탄탄하게 자리 잡았다. 대학입시 부활과 개혁개방 30년의 기간에 중국의 국력 신장만큼 인재가 성장했다. 5년 뒤에는 이들 세대 중에서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나온다.
사람 농사에 성공한 중국은 아직도 목이 마르다며 인재 육성에 엄청난 투자를 한다. 한편으로 한국의 교육은 총체적 난국에 직면한 형국이다. 어디서 실타래를 풀어 나가야 할지 난감하다. 대선을 코앞에 두고도 미래 교육의 비전을 제시해 주는 후보가 보이지 않는다. 중국이 한국에 대고 빈정댄 말이 있다. 역보역추(亦步亦趨·남이 걸으면 따라 걷고 달리면 따라서 달린다). 언제까지 이런 행보를 할 것인가.
이중 전 숭실대 총장 연변과기대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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