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냉정과 열정 사이

  • 입력 2007년 10월 1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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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재학 시절 당시 여당 국회의원과 여고생 간의 성 추문 사건이 터져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적이 있었다. 야당은 집권 세력의 모럴 해저드를 거론하며 거센 정치 공세를 퍼부었다. 강의시간에 이를 화제로 삼아 교수님과 토론이 벌어졌는데 양쪽의 견해가 확연히 달라 서로 놀라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온리 원’과 ‘원 오브 뎀’

학생들은 우선 집권당 의원이 딸 또래의 여고생에게 가발을 씌워 전국 각지의 유흥지를 돌아다니며 엽색 행각을 저지른 사실에 비판의 초점을 맞췄다. “국회의원이라면 물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청렴결백해야 하는데 어쩌자고 그런 몹쓸 짓을 저질렀느냐”는 것이다. 학생들의 상식에 따르면 국회의원은 일방적 가해자였고 여고생은 ‘늑대 앞의 어린 양’이었다.

하지만 교수님의 견해는 180도 달랐다. “내가 아는 국회의원들의 행태에 비추어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하지만 여고생이 아버지뻘의 중년 남성을 상대로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교수님의 판단으로는 국회의원이 몹쓸 짓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미성년자인 여고생한테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래전 얘기를 거론하는 것은 구속된 변양균 전 대통령정책실장과 신정아 씨에 대한 세간의 식지 않는 관심 때문이다. 학력 위조에서 출발한 이 사건은 ‘지퍼 게이트’를 넘어 ‘권력형 게이트’로 비화했지만 세상의 관심사는 23세 차인 이들의 ‘남녀 관계’에 더 쏠려 있다. 이 대목에서 또한 다양한 견해차가 있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어느 모임에서 50대의 한 대기업 임원은 “변 전 실장이 불쌍하다. 어쩌다가 ‘꽃뱀’한테 물려 일평생 이룬 명예를 한꺼번에 잃어버리느냐”고 말했다. 40대 중반의 문화계 인사는 “변 전 실장에게는 신 씨가 ‘온리 원(Only one)’이었겠지만 신 씨에게 변 전 실장은 ‘원 오브 뎀(One of them)’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특히 중상류층 일각에서 이 사건을 ‘신데렐라가 되고 싶었던 젊은 여성의 냉정한 계산’에 넘어간 ‘성공한 중년 남자의 사추기적(思秋期的) 열정’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있는 것은 의외의 대목이다.

반면 30대 중반의 한 전문직 여성은 “두 사람 모두 성인이므로 ‘비리’와 ‘부적절한 관계’는 구분해야 한다. 신 씨의 섭외 능력과 인맥 관리는 평가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 20대 여대생도 “고위 공직자가 나랏돈을 빼돌려 젊은 연인의 환심을 사려 했던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허위 학력으로 포장한 독신 여성에게 휘둘린 관계 재계 학계 문화계 종교계 지도층 인사들이 더 큰 문제 아니냐”고 되묻는다.

앞에서 국회의원과 여고생의 성 추문 토론에서 국회의원을 일방적으로 비난한 바 있다. 하지만 30년의 시차가 있어서일까. 성격은 다르지만 이번에는 변 전 실장의 몰락에 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느낀다. 우선 그는 자신을 키워 준 정권에 치명타를 가했고 가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자신을 후원 옹호했던 친구들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에 관한 한 우리 사회는 전통적으로 남자에게 그 책임을 물어 왔다. ‘공과 사를 구분 못한 공직자’라는 비난은 무엇보다도 그를 수치스럽게 할 것이다. 끈 떨어진 남성은 연인에게서도 버림받기 마련이다.

게이트 열쇠 쥔 신정아 씨

신 씨가 잃은 것도 물론 적지 않다. 동국대 교수, 광주비엔날레 예술 총감독, 성곡미술관 학예실장 등 화려했던 ‘분식적(粉飾的) 커리어’에 치명타를 입었다. 하지만 검찰에 불려 다닐 당시 변 전 실장은 말할 수 없이 초췌한 모습이었던 반면 신 씨가 보인 묘한 웃음과 당돌한 태도는 왠지 여운을 남긴다. 신 씨에 대한 비난도 호기심으로 바뀐 지 오래다. 이 사건의 드러나지 않은 내막이 훗날 상당한 파괴력과 상품성을 갖게 될 수도 있다. ‘게이트’의 열쇠는 여전히 신 씨가 쥐고 있는 셈이다.

오명철 편집국 부국장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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