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 칼럼]오역의 묵계

  • 입력 2007년 7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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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에 일본에서 ‘오역-번역문화론’이란 책이 나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저자는 벨기에 출신의 그로타스 신부(神父)로 중국과 일본에 장기간 체재했던 언어학자다. 그가 일본 도착 후 서점에 들어가서 놀란 것은 번역서의 범람이었다.

번역서가 오역투성이임을 곧 알게 되고 번역에 대한 비판이 없다는 사실이 큰 문제라고 생각되어 욕먹기를 각오하고 책을 냈다. 책에는 유수한 출판사에서 나온 유명 교수들의 번역서에 보이는 오역이 구체적으로 지적되어 있다. 유수한 종합지에 게재된 논문에 보이는 오역의 빈도도 수치로 적시했다.

일본 근대화의 첨병은 외국인 교사, 유학생, 구미 시찰단, 번역이라는 말이 있다. 일본의 번역 열기는 그만큼 대단하고 다양성과 수량에서 세계 으뜸이다. 어느 미국인 연구자는 일본을 ‘번역자의 천국’이라고 말한 바 있다. 번역자의 사회적 위상이나 수입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도 혹은 그러기 때문에 1960년대에 나온 외국인의 발언이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그쪽 사정이 얼마나 개선되었는지는 아는 바 없다.

영미문학 1등급 번역 10종 불과

일본 번역서에 오역이 많은 이유가 번역에 대한 비판이 없는 현상과 관련된다는 지적은 적절한 진단이다. 외국어 실력이 달리고 언어 감각이 무딘 데다 책임감이 부족한 것이 주요 원인이겠지만 비판 부재는 만성적 타성의 교정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쪽 소장 영문학자 모임인 영미문학연구회에서 번역평가사업단을 구성하고 이왕에 출판된 영미문학 번역서를 면밀히 검토하여 실상을 책으로 묶어 낸 것은 늦은 감은 있으나 지극히 의미 있는 일이다.

평가단은 2명 이상이 한 팀이 되어 동일한 원본에 대한 다수의 번역본을 일일이 대조 검토한 후 다수가 참가한 공동 토론을 벌였다. 검토 대상은 광복 직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출판된 71종의 작품 번역본 약 900종이다. 원문 충실성과 가독성을 기준으로 6등급으로 나누어 평가해 분류하고 그 결과를 2권으로 된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로 묶어 출간했다.

번역문을 원문과 대조하면서 읽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수다한 번역본을 비교 검토하는 작업도 흥미진진한 일은 아니다. 비판의 무풍지대이고 아무런 선택 기준도 보이지 않는 분야에 비평적 지도를 작성하련다는 선구적 열의를 가지고 작업에 임한 흔적이 역력하다.

보고서 내용은 불결하고 참담해서 출판계와 번역자에 대해 강력한 경종을 울려 준다. 오류가 없고 완벽하달 수 있는 1등급의 번역본은 10여 종에 지나지 않는다. 오류가 보이나 신뢰할 수 있는 2등급의 번역본을 합쳐 추천본이라 했는데 모두 87종이고 검토본 중 10%에 미치지 않는다. 10권 중 그나마 신뢰할 수 있는 번역본이 1권밖에 안 되는 셈이다.

가장 한심스러운 내용은 선행 번역을 베끼거나 윤문한 표절본이 48%에 이른다는 점이다. 30종의 번역본 중 무려 90%에 해당하는 27종이 표절본인 경우도 있다.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공범자 처지여서 쉬쉬하던 차였는데 병폐가 이리 심각한 줄은 다들 몰랐을 것이다.

이것이 영미문학 번역에 국한되는 현상일까? 다른 외국문학 번역은 안전할까? 문학 번역의 경우 오류가 있더라도 해독은 제한적이다. 과학 분야에서 그 해독은 파괴적이다. 어찌 번역에 한정된 현상일까? 저서나 논문 분야에서 가독성이나 표절성은 신뢰할 수 있는가?

침묵 깨고 활발한 비판을

우리 사회에는 ‘좋은 것이 좋다’며 쉬쉬하는 침묵의 묵계가 만연해 있다. 그것은 부패와 정체의 온상이 되고 그 결과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이비 사건이 간헐적으로 터진다. 사이비와 불량자와 불량 서적이 판을 치는 모습은 동일한 사회 병리에서 나온 평행 현상이다.

모든 분야에서 침묵의 묵계를 파기하고 건설적 비판을 활발히 전개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번역평가사업단의 집단적 노력은 하나의 전범이자 후속 노력을 촉구하는 선구적 사례가 되어 마땅하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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