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녕]주민소환제

  • 입력 2007년 5월 26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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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아테네 시민들은 매년 봄이면 아고라(agora)라고 불리는 광장에 모였다. 민의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정치를 하거나 국가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지도자(주로 독재자)를 골라내기 위해서다. 도자기 조각에 대상자의 이름을 적는데 시민 6000명 이상의 지목을 받은 사람은 10년간 국외로 추방됐다. 이른바 ‘도편(陶片)추방제’로 그리스 민주정치의 토대였다. 그러나 당초 취지와 달리 정적(政敵) 제거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바람에 90여 년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도편추방제를 본뜬 오늘날의 주민소환제는 미국 일본의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스위스 일부 주에서 시행되고 있다. 영화 ‘터미네이터’로 유명한 미국의 근육질 영화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2003년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변신한 것도 주민소환제 덕이었다. 당시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가 재정적자에다 에너지 가격 급등까지 겹치면서 무능한 지사로 낙인찍혀 주민소환투표 끝에 물러나는 바람에 슈워제네거가 130여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당선됐다.

▷우리나라에서도 25일 주민소환법이 발효돼 7월 1일부터 지방자치단체장과 지방의회 의원을 대상으로 한 주민소환제가 시행된다. 소환 요건과 투표 회부에 몇 가지 보완장치를 두었지만 대상자들은 오금이 저릴 수밖에 없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언제 주민의 ‘탄핵’을 받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민의 견제와 감시가 철저해져 지역행정의 투명성과 책임감이 높아지고, 그에 따라 지방자치가 국리민복에 더 기여한다면 이 법 제정의 취지가 살아나는 셈이다.

▷그러나 주민소환제는 양날의 칼이다. 지자체장 등이 주민의 눈치를 더욱더 살펴야 하기 때문에 공익(公益) 우선 원칙에 따라 소신껏 일하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선거 낙선자 쪽에서 법을 악용하거나 시민단체 이익단체 등이 의도적으로 대상자들을 흔들 소지도 있다. 지역이 정쟁(政爭)의 장(場)으로 변질돼 화합을 해칠 우려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지자체장 등이 재선 삼선을 위해 포퓰리즘적 행정을 펴는 경향이 문제시되는데 이 제도가 그 같은 행태를 더욱 부채질하지 않을지도 걱정이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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